화순 정암 조광조 선생 유배지에 다녀오다.
2024년 11월 10일(일)에 대전 한밭문화원의 11월 문화탐방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첫 번째 답사지로 전남 화순군 능주면 정암길 30(능주면 남정리 173-2)에 있는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 선생의 유배지에 다녀왔다. 정암 선생은 조선 중종 때 개혁정치를 펼치고자 노력하다, 훈구세력의 저항으로 사사(賜死) 즉, 사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는 형을 받았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비호로 사사를 면하고 이곳 화순(예전에는 능주라 하였다)으로 유배되었다가, 훈구파가 영의정 등 삼 정승에 오르자 유배 생활 한 달여만인 1519년(조선 중종 14년)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이곳 유배지에서 사사(賜死) 하셨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조광조를 검색하면 무려 910건의 기록이 검색되고, 중종실록에서만도 517건이 검색된다. 그만큼 조정에서의 역할이 컸던 분이다. 1515년(중종 10년)에 33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등을 거쳐 4년여만인 1519년(중종 14년)에 대사헌에 오른 분이다. 정암 조광조 선생은 김굉필에게 수학하였고,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역설하였다. 김광필, 조식 등과 함께 『소학(小學)』을 중시하여 어린이들에게 먼저 가르치기도 하였다. 조광조 선생은 소학과 함께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여동래와 함께 엮은 『근사록(近思錄)』을 중시하면서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된 분이다.
중종 반정 즉,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 공신들이 중종을 왕으로 옹립한 반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신으로 이름을 올렸다. 대사헌 조광조 선생은 훈구 세력에 의해 이루어진 반정 때 공신으로 아무런 역할도 안한 사람들까지도 공신이 된 사람들에 대한 위훈 삭제를 주장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14년(1519년) 11월 9일자를 보면, 대사헌 조광조 등이 중종에게 공신 즉, 반정 공신들의 공을 거론한 후 6일 후인 11월 15일에 옥에 갇히고 만다.
중종 반정 이후 진보적인 사림파들이 새로운 권력을 대부분 장악하고 왕권을 위협하자, 중종은 아마도 위협을 느끼고 사림파 대신 훈구 세력의 편을 들어 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 왕권 강화를 위해 정도전 등을 제거한 태종의 사례와 일맥 상통한다. 중종은 훈구 세력인 반정 공신들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옹립한 왕이라 왕권이 취약한 상태였고, 기묘사화를 불러 일으킨 훈구 세력의 반격을 인정하여 사림파 학자들을 제거하게 되었다.
유배지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평삼문으로 들어가면 애우당(愛憂堂)이라는 현판이 있는 강당이 있고, 왼쪽에는 조광조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과 유배와서 살았던 초가집이 있다. 이곳 초가집은 관노의 집이었다고 한다. 영정각 앞 쪽에는 ‘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정암 조선생 적려 유허추모비)’가 있는 비각이 있다. 비문은 1667년(현종 8년)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었고,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글씨를 쓰고 능주목사였던 민여로가 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에 앞서 1568년(선조 원년)에 조광조 선생은 원통한 일을 푼다는 신원(伸冤)이 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러 서원의 문묘에 배향되었다.
애우당은 1986년에 세워진 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에 가운데 마루를 둔 구조이다. 愛憂堂(애우당) 편액은 후학(後學) 이병현(李炳玹)의 글씨로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였다"는 문장에서 애(愛)와,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다"는 문장에서 우(憂)를 가져왔다고 한다. 애우당 안에는 조광조 선생의 절명시(絶命詩)와 최후의 진술이 적혀 있는, 역모무고공술(逆謨誣告供述) 그리고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의 편액이 있으며, 애우당기(愛憂堂記) 편액도 걸려 있다.
추모비는 1667년(현종 8)에 당시 능주목사였던 민여로(閔汝老:1598~1671)가 주도하여 세웠다. 처음에는 비석만 세워졌고, 비각은 18세기 말 정조 대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이다. 창방과 평방을 두르고 우물천장을 하였으며 방풍판을 달았다. 1982년, 1983년, 1997년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어찌보면, 조광조 선생이 한달도 안되는 기간에 유배 생활을 했던 유배지라서 가볍게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조광조 선생의 개혁정신이 더욱 더 필요한 시기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문화탐방이었다. 사약을 가지고 내려온 금부도사 유엄(柳渰)에게 부탁하여 죽기 전에 시간을 달라하여 지은 절명시에서도 어느 누구한테도 원망이나 증오도 없이 오로지 충심을 말하고 있다.
좁은 공간이지만 문화관광해설사의 역사 해설과 유배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예전에 학창시절과 한국사 능력시험을 보느라 공부했단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한번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다. 조광조 선생의 절명시를 기억하기 위해 여기에 남긴다.
愛君如愛父(애군여애부,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하였고)
憂國若憂家(우국약우가, 나라를 집안처럼 걱정하였네)
白日臨下土(백일림하토, 밝은 해가 위에서 굽어보노니)
昭昭照丹衷(소소조단충, 나의 충심을 환희 비춰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