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부여박물관(2) - 부여 석조가 있는 로비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
2025년 12월 25일에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부여읍 동남리 산 18-2)에 있는 국립부여박물관에 다녀왔다. 부여박물관은 1929년 재단법인 부여고존보존회를 모태로 하고, 일제강점기인 1939년 조선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으로 개관하였다가 1945년 10월 13일에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으로 개관한 후 올해가 개관 80주년을 맞이하는 국립박물관이다. 현재 개관80주년 기념특별전이 열리고 있고, 지난 2025년 12월 23일(화)에 백제대향로관이 새롭게 개관하였다. 백제금동대향로 “단 한 점을 위한 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멋진 전시관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로비에는 백제 궁궐터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커다란 석조가 있고, 석조를 중심으로 제1전시실부터 제4전시실이 있다. 원형 로비 중앙에 있는 화강암 석조는 부여석조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국가유산포털의 소개자료에 따르면, 현재 관북리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에 있던 부여현의 동헌 건물 앞에 있었던 것을 일제시대에 옛 박물관 뜰로 옮겼다가 현재의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부여석조는 왕궁에서 연꽃을 심어 그 꽃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는 백제시대의 유물로, ‘工’자형의 받침대 위에 둥근 꽃망울 형태로 올려져 있다. 받침대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결한 모양이다. 그 위에 놓인 석조는 입구가 약간 오므라들면서 밖으로 둥글게 원호를 그리며, 바닥은 평평한 듯 하나 완만한 곡선이다. 표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8개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의 1층 탑몸돌에 새겨진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내용과 같은 글을 새기려던 흔적이 보인다.
이 석조에는 연꽃무늬 장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사찰과 관계된 유물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본래 이 석조가 있었던 장소가 백제시대의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어, 당시 왕궁에서 쓰이던 석련지(石蓮池)가 아니었나 짐작된다. 형태가 풍만하면서도 깔끔한 곡선으로 처리된 석조로, 백제인의 간결하고 소박한 미적 감각이 잘 나타나 있다.(인용문헌: 국가유산포털 – 부여석조)
제1전시실은 부여의 선사와 고대문화라는 주제로 각종 석기와 청동기 및 철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충청남도의 청동기시대부터 마한까지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요령식 동검과 청동 도끼 거푸집 등이 발굴된 송국리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제2전시실은 사비도성과 왕경인의 삶이라는 주제로 사비 천도 후의 왕경 문화와 능산리 사찰지에서 발굴된 석조사리감, 부여 군수리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요강인 호자(虎子), 관북리에서 출토된 부여 사택지적비 등을 전시하고 있다. 왕자가 신라와 싸우고 있던 관산성 전투를 응원하러 가던 성왕이 지금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서 신라군에게 체포되어 목이 잘리는 시해를 당하는 아픈 역사를 일깨워주는 석조사리감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없지만 일본사기에서는 백제사기를 인용하여 성왕의 머리를 북청의 계단 밑에 묻어 지나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게 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은 1995년에 발견되어 1996년 5월 30일부로 국보로 등재되었다.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 자리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국가유산포털의 소개 자료를 보면,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이 훼손된 상태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터널형으로 높이 74㎝, 가로·세로 50㎝이다. 감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었으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턱이 마련되어 있다.
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다. 명문(銘文)에 의하면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으로 파악된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 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으로서 그 중요성이 크다.(인용문헌: 국가유산포털 -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부여 사택지적비는 백제 의자왕 대의 인물인 대좌평 사택지적(沙宅智積)이 은퇴 후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다. 비석의 형태를 갖춘 유물로서 백제인의 손으로 제작된 유일한 경우이다. 특히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인 사택씨(沙宅氏) 출신의 사택지적은 "일본서기"에서 대좌평(大佐平)의 지위로 왜국에 사신으로 파견된 사실이 확인되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사찰의 전각(殿閣)과 탑상(塔像)을 조성하며 새긴 비석인 만큼,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사택지적비는 백제 후기 귀족들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고 백제 관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또 격조 높은 문체와 서법은 백제의 수준 높은 문화를 잘 보여준다.
1993년 12월에 능산리 사찰지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대향로는 별도 전시관을 마련하여 옮겨져 있다. 나무조각에 쓰여진 글자를 보며 백제인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구구단을 적혀 있는 목간을 보면서 백제인의 일상생활에 수학의 원리가 깊게 자리하였음을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