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부여 관북리 유적을 둘러보다.

아진돌 2026. 1. 1. 09:20

2025년 12월 18일(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번지 외 부소산성 남쪽 기슭에 있는 부여 관북리 유적에 다녀왔다. 부여 관북리 유적은 1983년 9월 충청남도 기념물 전백제왕궁지(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어 있다가, 2001년 2월에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현재 부소산성 서문으로 올라가는 길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구 부여박물관 건물로 사용되었던 흰색 건물이 부소산을 꽉 메운 채로 남아있고,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아 건물로 사용되었던 동헌, 객사, 내동헌 등이 남아있다. 동헌 건물 옆에는 홍가신, 허목, 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사당인 도강영당이 있다. 서쪽 방향의 구렛나루 쪽에는 대형전각건물지와 목곽수조, 목곽창고 등이 있다.

 

국가유산포털의 소개 자료에 따르면, 1982년부터 충남대학교 박물관에서 5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1983년도에는 방형석축연지(方形石築蓮池)가 발견되었고,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992년 조사에서는 구 부여박물관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시대의 도로 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백제시대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도성의 일부 유적이 밝혀진 것은 매우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인용문헌: 국가유산포털 – 관북리 유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소개된 자료를 보면, 1982년 이래의 발굴조사를 통해 왕궁 건설과 확장을 위해 조성한 성토(盛土) 대지와 그 위에 만들어진 대형전각건물 등 기와로 기단을 꾸민 와적기단(瓦積基壇) 건물터, 남북과 동서 방향의 도로, 축대 및 배수로, 덧널수조(木槨水槽, 목곽수조), 기와 배수관, 연지(蓮池),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대지 조성 이전에 왕실 수공업 생산지였음을 보여주는 철기, 금 및 금동제품 제작소 등 공방(工房)시설과 함께 나무와 돌로 구축한 지하곳간이 밀접한 저장시설단지 등도 확인되었다.

 

왕궁터의 연못은 옛 국립부여박물관 앞 광장에서 발견되었는데, 호안(護岸)은 막돌을 이용하여 4∼5단 높이로 쌓아 올렸다. 동서가 긴 장방형으로, 규모는 남북 길이 6m, 깊이 1m 내외의 크기이며, 동서 길이는 7m가량 조사가 이루어졌다. 연못 안의 퇴적토는 크게 3개 층으로 구분되는데, 최하층은 황갈색 토층으로 목간(木簡), 금동제 귀걸이, 기와 및 토기편이, 중간층은 흑회색 점질토층으로 벼루, 등잔, 바구니 등이, 최상층에서는 개원통보(開元通寶), 철모, 철촉 등이 발견되었다.

 

연못에 인접한 동쪽 지역에서는 남북과 동서로 교차된 도로망 유적의 일부가 확인되었다. 남북 도로는 연못 동쪽 30m 지점을 기점으로 개설되어 있는데, 너비 10.9m, 남북 길이는 약 40m가 확인되었다. 도로의 가장자리에는 배수로 시설이 있는데, 너비 45㎝ 간격으로 두께 5㎝ 정도의 판자를 양단에 세워 만들었으며, 서편 도랑의 경우 마지막 시기에는 막돌을 이용하여 너비 20㎝ 정도의 배수로로 좁혀 만들었음이 확인되었다. 동서 도로는 너비가 3.9m로서 가장자리에는 역시 배수로시설이 있는데, 내부는 암키와, 수키와가 인위적으로 채워져 있었다.

 

도로의 교차지점에는 잘 다듬어진 화강암을 이용하여 암거(暗渠)시설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너비 120㎝, 길이 130㎝의 화강암 판돌 3매를 남북방향으로 이어서 깔아 놓았으며, 그 총 길이는 동서 도로의 너비와 같았다. 한편 남북 도로는 부여 중심에 있는 정림사(定林寺: 부여 정림사)의 중앙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기단과 석축시설은 구 부여박물관 동편에 인접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건물터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와적기단(瓦積基壇)이었고, 석축시설은 그 높이가 80㎝에 이르는 것으로 왕궁의 북쪽 한계선을 밝혀주는 자료로 생각된다. 석축 시설의 서쪽에서는 석축으로 된 조그마한 샘이 발견되었다. 와적기단 건물터와 석축 시설 사이에는 도로와 배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건물터 기단과 배수로 내부에서는 토기 표면에 얼굴 무늬가 있는 것(人面文土器), 토기의 태토(胎土)가 매우 정선된 완형토기들, ‘北舍(북사)’명이 있는 항아리, 연화문(연꽃무늬) 수막새, 동으로 만든 숟가락과 철제품이 발견되었다. 얼굴무늬가 있는 토기편은 백제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완형토기는 규격에 따른 제품생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표면에 ‘七(칠), 八(팔)’ 등의 숫자가 오목새김된 것도 있다.

 

공방터는 남북 도로 유적에서 동편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동서가 긴 장방형 움(竪穴, 수혈) 내부에 노(爐)시설이 있었던 곳과 가로로 된 손잡이가 상하에 각각 4개씩 부착된 토관을 이용하여 만든 집수구시설이 있었다. 움 내부에서는 철제편들과 석제추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공방시설이나 창고시설이 폐기되고 정연한 배치의 도로, 기와기단 건물, 연못 등으로 대체된 시기는 성토층 속에 포함된 중국 자기 등을 통해 볼 때,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양상은 사비 도성의 점진적 확대에 따른 궁성 중심 권역의 확장과 관련될 개연성이 높다.

 

그동안 관북리 유적에서는 금동 광배, 도가니, 다양한 목제품과 목간, 수부(首府)명 기와, 각종 인장와(印章瓦), 연화문 수막새, 사람얼굴이 그려지거나 찍힌 토기, 중국제 자기, 과일씨앗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인용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관북리 유적).

 

구 부여박물관 건물 앞에는 동헌과 같은 해에 지은 객사가 있다. 건물의 형상은 다른 지역의 객사와 유사하나 규모가 작은 것이 특징이다. 1945년에 이곳에서 백제관(百濟館)’이라는 현판을 걸고 부여박물관이 개관한 곳이다. 객사는 왕명을 받들고 출장 내려오는 관리를 접대하고 유숙시키던 곳으로, 정당과 익실을 두었다. 중앙에 한층 높게 세운 정당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그 좌우에 있는 동서 익실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정당의 대청에는 궐패를 모셨고, 익실에는 온돌방을 들였다. 박물관 진열실 등으로 사용하면서 내부가 변형되었으나 기본 구조는 남아있다. 정당 처마에는 봉황머리와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였다.

 

객사 동쪽에는 부여동헌이 남아 있다. 국가유산포탈의 소개 자료를 보면,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아 건물로 동헌, 객사, 내동헌 등이 남아있다. 동헌은 당시 부여현의 공사를 처리하던 곳으로, 고종 6년(1869)에 지었고 1985년에 크게 수리하였다. 동헌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도 하는 공포를 짜지 않은 민도리집으로, 왼쪽 3칸은 대청으로 판벽을 치고 문을 달았으며, 오른쪽 2칸은 온돌방을 들이고 앞쪽에 툇마루를 놓았다. ‘초연당(超然堂)’이라는 현판이 결려 있으며 ‘제민헌’이라고도 한다.

 

현감의 처소인 내동헌은 앞면 5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3칸의 대청과 그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들였다. 백제시대의 주춧돌과 기단석을 사용하여 건물을 지었으며, 정원에는 지금도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많이 있다.

 

동헌 건물 옆에는 도강영당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조선말 부여현의 관아 건물이던 것을 1971년 신축하여 홍가신, 허목, 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영당은 앞면 1칸을 개방하여 참배공간을 마련하고 뒤쪽은 통칸으로 3인의 영정을 모셨다.

 

국가유산포털의 소개자료를 보면, 홍가신(1541∼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22년(1567) 문과에 급제하여 강화부사, 형조참판, 강화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선조 37년(1604)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에 봉해졌다. 후에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허목(1595∼1682)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그림, 글씨,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채제공(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735년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영조의 세자 폐위 문제를 죽음을 무릅쓰고 막았는데, 이로 인해 영조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병조, 예조, 호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 좌의정으로 행정의 최고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수원성 건설에도 참여하였으며 『경종내실록』, 『영종실록』, 『국조보감』의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 남북 동서대로 유적
▲부여 객사
▲구 부여박물관 건물 -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로 왜색 논란에 휩싸였던 건물이다.
▲ 지금은 부여 갤러리 현판이 결여 있고 2026년까지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다.
▲ 일요일이라 그런지 문이 닫혀 있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다.
▲ 부여현 동헌 건물 - 초연당(超然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동헌 옆의 고목 - 저 멀리 부소산성 정문이 보인다.
▲ 현감의 처소인 내동헌
▲도강영당 정문 - 홍가신, 허목, 채제공의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모시는 곳
▲ 도강영당 앞쪽의 공방지 - 철기제작소 등 공방시설이 있다.
▲ 동쪽 공방지까지 둘러 보고 부소산성 정문으로 향한다.
▲ 아래쪽 사진들은 관북리 유적 중에서 서쪽 구드레 나루터 쪽 유적이다.

▲부소산성 서문 쪽에서 바라본 관북리 유적 - 대형전각건물지 등이 있다.

 

▲ 읍내 로터리에 있는 성왕상 - 웅진에서 시비로 천도하신 성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