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부여 부소산성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6. 1. 1. 09:45

2025년 12월 28일(일)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로 31(구아리 산 4)에 있는 부소산성에 다녀왔다. 관북리 유적을 둘러보고 부여 동헌 쪽에 있는 부소산문으로 들어가서 삼충사, 영일루, 군창터, 반월루, 궁녀사, 사자루를 둘러보고, 낙화암과 고란사를 갔다가 사복사지를 지나 서문으로 나오는 산책길을 걸었다.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여 관북리 유적을 둘러보고 부소산성을 한바퀴 돌고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램블러가 약 9.3킬로미터를 찍어주었다. 지난 8월 이후 허리 고장으로 간헐적 파행을 겪으면서 제대로 걷지를 못했는데 오늘에야 가장 오랫동안 걸은 셈이다.

부소산성 리플렛에 따르면, 부소산성은 백제 사비시대(538~660)의 왕궁의 배후산성이다. 평상시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하다가 위급할 때는 왕궁의 방어시설로 이용되었다. 서쪽으로는 백마강을 끼고 부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표고 105m의 부소산 정상에 축조되었다.산성 내부에서는 많은 수의 건물지가 발견되었고, 슬픈 전설을 간직한 낙화암과 고란초로 유명한 고란사가 있다.
 
금의 공주인 웅진에서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二重)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93~1994년에 걸쳐 실시한 고고학적 조사 결과, 계곡을 품으면서 외곽을 두르는 백제시대 성벽과 그 안에 만들어진 통일신라 시절부터 조선시대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백제시대 산성의 전체 길이는 외곽선을 기준으로 2,495미터이며, 바닥의 너비는 56미터, 높이는 3미터 내외라고 한다. 부여군민과 경로 우대자에게는 입장료가 무료이고 외부에서 온 관광객에게는 천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관북리 유적을 둘러보고 부여동헌에서 동쪽으로 가면, 부소산문을 만난다.부소산문을 지나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면 삼충사(三忠祠)를 만난다. 위기를 치닫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백제 말의 세분의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잘 못된 정치를 바로잡고자 애쓰다가 옥중에서 단식으로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막고자 백제의 요충지인 백강과 탄현을 방어하고자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지키지 못한 충신이다. 계백장군은 5천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인 홍산벌에서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 대군과 싸우다 전사한 장군이다. 1957년에 건립하였다가 1981년에 새로 지었다. 삼충사 옆에 있는 연지에는 살얼음 밑에 황색과 파란 잎을 드러내는 수련이 정말 예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삼충사를 지나 산성 동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이층 누각인 영일루(迎日樓)를 만난다.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지금 있는 영일루 누각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었다고 한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왕이 멀리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나랏일 또는 일과를 구상했다고도 전해지는 곳이다. 영일루 옆에서는 군창지 발굴조사가 한창이었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조금 넓은 곳 옆에서 부소산성 수혈건물지 자료관을 만난다. 자료관 안에 들어가면 이곳에서 발굴된 수혈건물지(竪穴建物址)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수혈건물이란 땅을 파고 그 위에 간단한 지붕을 만든 움집 형태의 주거시설로 백제시대의 주거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건물 형태로 추정된다. 부소산성 수혈건물지는 1983년에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되었으며, 이후 2000년에 5기의 건물지 유구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5기의 건물지는 방형의 평면 형태나 불을 피웠던 노지를 설치한 내부 구조 등에서 거의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고 한다. 이곳 자료관에는 이곳에서 발굴된 백제의 무구류(武具類)에 대한 설명 자료를 볼 수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양지창, 마름쇠 등 무구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자료관을 나와 조금 가면 부여 시가지가 훤히 보이는 반월루를 만난다. 1972년에 세운 이층 누각이다. 날씨가 흐려 백마강과 부여 시가지가 희미하게 보여 아쉬웠다. 반월루를 지나면 서쪽 문에서 올라오는 길과 낙화암과 고란사로 가는 길이 만나는 사거리를 만난다. 우측으로 내려가는 태자골 숲길을 따라 내려가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세운 사당인 궁녀사(宮女祠)가 있다. 사당 안에는 세분의 궁녀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언뜻 생각하면 어린 궁녀들이 그려져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풍만한 궁녀 세분이 보관을 쓰고 계시는 초상화이다. 백제문화제가 열릴 때 이곳에서 궁녀제를 지낸다는 안내판이 있다.
 
다시 낙화암으로 가는 사거리로 되돌아 나와 발걸음을 옮긴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낙화암과 고란사 가는 길을 걸으며, 이곳에서 막을 내린 백제의 영광을 되돌아본다. 낙화암 가는 길에서 또 하나의 이층 누각인 사자루(泗泚樓)를 만난다. 이곳은 부소산성의 서쪽 기슭으로 주소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678-2에 있다. 국가유산포털의 소개자료를 보면, 사자루는 부소산 서쪽 봉우리 정상, 곧 달을 보내서 ‘송월대(送月臺)’라 불리는 봉우리에 있다. 이곳은 해발 106m로 부소산에서는 가장 높아서 동으로는 계룡산, 서로는 구룡평야, 남으로는 성흥산성, 북으로 울성산성과 증산성 등이 보여 전망이 아주 좋다. 아마 백제 시대에는 망루가 있어서 부소산성의 서쪽 장대 구실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소개하고 있다. 
 
오래된 소나무 서너 그루 뒤로 보이는 이층 누각은 부소산성의 누각들 중에서 가장 멋진 광경을 보여준다. 백마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어서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 국가유산 포털에 따르면, 사자루는 1919년 당시 부여군수인 김창수가 주도하여 임천 문루인 배산루(背山樓)를 옮겨 지었고, 1990년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땅을 고르다가 보물로 지전된 금동석가여래입상(일명 정지원명 금동불)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사자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의 건물로 1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웠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익공 계열로 익공과 익공 사이에 화반 대공을 설치하였다.

한편, ‘사자루(泗泚樓)’ 편액은 기미년(1919) 5월에 고종의 아들인 의왕(義王) 이강(李堈)공이 썼고, ‘백마장강(白馬長江)’ 편액은 조선 말기 명필인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썼다. 참고로 사자루가 사비루로 불리었던 이유는 현판의 글씨중 ‘泗泚樓’를 ‘泗沘樓’로 잘못 읽은데서 비롯됐다. 이런 혼동의 시초는 『삼국유사』에 부여를 ‘泗沘’, ‘泗泚라 혼용된 데서 비롯되어 현재까지 이어진 듯하다. 그런데 泗沘는 배’로 해석되는데, 泗는 新·東·赤의 의미로 ‘所’와 같고 沘는 伐·佛·火·夫里와 같이 ‘넓은 들판’이나 ‘마을’을 의미하니, 결국 부여의 별칭인 ‘所夫里’와 같은 뜻이다. 그래서 2002년 1월 3일 문화유산자료 명칭변경이 받아들여저 ‘사비루(泗沘樓)’를 ‘사자루(泗泚樓)’로 명칭변경하고, 사자루 현판을 교체하였다.(출처: 국가유산포털 - 사자루). 

 
낙화암과 고란사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서면 낙화암으로 가는 길목에 소나무 사이로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백화정 (百花亭) 이라는 정자를 만난다. 백마강이 내려다 보이는 낙화암 정상 바위 위에 육각 지붕으로 세워진 정자이다.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부풍시사'라는 시모인에서 건립한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의자왕의 타락 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삼천 궁녀라는 가짜뉴스를 퍼트린 승자의 역사 기록을 떠올리며 낙화암 위의 데크 전망대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낙화암은 백마강에 서 있는 높이 40m 절벽이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은 궁녀의 죽음을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한 후대의 표현이 굳어진 것이라는 리플렛의 안내문을 읽어 본다. 『삼국유사』와 『백제고기』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이름은 타사암이었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50여년 만에 다시 와본 낙화암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구경하고 되돌아 나와 고란사로 향했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 강에 자리하고 있는  고란사(皐蘭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아쉽게도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극락보전 중창공사가 진행중이라 모든 전각들이 해체된 상태였다. 국가유산포털에 따르면, 고란사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법당과 요사(窯舍)의 건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사찰이다. 이 사찰은 불적(佛跡)보다는 고란초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법당 뒤편에서 나오는 약수와 함께 이 사찰의 명물을 이루고 있다. 고란사는 백제 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나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고, 현재의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 건물(寺刹建物)은 은산(恩山) 승각사(乘角寺)를 이건(移建)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임시 법당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보살좌상에 반배를 올리고, 고란사 약수터에 가서 시원한 약수물 한 바가지로 목을 추긴다. 많은 관광객들이 영종각(靈鐘閣)을 지나며 궁녀들의 혼을 기리기 위해 범종을 치고 있었다. 고란초는 안내판으로만 구경하고 디돌아 나와 종무소에서 2026년도 달력을 얻어 나온다. 친절하게 달력을 나누어 주신 종무소 처사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고란사를 둘러보고 부소산성을 나오는 길에 서복사지(西覆寺址)를 둘러보았다. 서복사지는 원래의 사찰명은 알 수 없으나, 그 동안의 발굴조사 결과 남북 자오선상에 중문―탑(목탑)―금당 순으로 건물을 배치하였던 전형적인 백제 사찰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사지에서 출토된 치미, 금동판, 소조불두, 금동제 과판, 청동제 등개, 벽화편 등으로 보아 백제 왕실의 원찰 성격이 강한 중요 사찰지로서, 사지의 축조공법 또한 정교하여 백제사원 양식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서 보존가치가 크다고 한다.
 
기억으로는 50여년만에 찾은 부소산성을 둘러보았다. 보람있는 하루였다. 특히 그동안 허리 고장으로 인한 간헐적 파행을 겪으며, 1킬로미터 이상을 걷는 것이 어려웠는데 오늘은 9.3 킬로미터를 걸은 것만으로도 뿌듯했다. 지난 12월 25일 국립부여박물관과 정림사지를 둘러 보고, 오늘 12월 28일에 다시 찾은 부여는 참 마음에 드는 곳이다. 포근한 마음으로 답사를 마치고 여기에 기록을 남긴다.
 

▲ 삼충사 옆의 연지
▲ 영일루
▲ 영일루 옆의 군창지 발굴조사장
▲ 부소산성 수혈건물지 자료관
▲ 반월루

 

 

 

▲ 사거리에서 우측 궁녀사 쪽으로 내려간다.
▲사자루(泗泚樓) - 泚은 강이름 자
▲ 누각에서 바라보는 차경이 정말 멋지다.
▲강 건너 산밑에 백제 사비왕궁을 재현해 놓은 백제문화단지가 있다.
▲ 낙화암과 고란사 가는 길
▲ 백화정
▲ 황포돛배 - 구드레나루터에서 고란사까지 운행하는 유람선
▲극락보전 중창공사가 한창인 고란사 - 공사가 마무리되면 다시 와 봐야겠다.
▲ 약수를 마신 초등학생이 하는 말 - "나는 세번 마셔서 어린애가 되겠네." ㅎ ㅎㅎ
▲부소산성 서쪽 문 - 구 부여박물관 뒷편으로 나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