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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수덕여관

아진돌 2020. 9. 24. 08:21

2020년 9월 13일에 대한불교 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일곱 번째 답사지로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를 참배한 후 내려오는 길에 들렀다. 입구에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으나 초가지붕은 이엉을 새로 올리지 않아서 지붕의 여러 곳이 주저앉아 있었다. 마루에 앉아 지붕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수덕사에 갈 때마다 수덕여관에 얽힌 이야기들을 떠올려 본다. 특히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 1904~1989) 화백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대전 서구에 있는 집 근처에 이응로 미술관이 있어서 더욱 그런가 보다. 이응로 화백은 홍성 출신으로 한학을 배운 바가 있어서 붓글씨를 쓰던 필묵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문자 추상 시도와 시대정신에 투철한 작품세계로, 국내는 물론 프랑스와 유럽 화단에 큰 영향을 미친 대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정신세계를 접목 승화시킨 근현대 미술사에서 선구자적 예술가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수덕여관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초가집 여관으로, 이응로 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6.25전쟁 당시 피난처로도 사용하였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수덕사 위쪽에서부터 내려온 좁은 개울물이 집 앞으로 흘러 지나가고 개울 건너편에 여관을 배치하였다. 가운데 안마당을 두고 ‘ㄷ’자 초가가 감싸고 있는 여관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데, 여관만 아니라면 소담하면서 궁색하지 않은 전형적인 농가 모습이라 하겠다.

   

여관 전면에는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두었는데 이 문을 중심으로 좌우 입면이 다르다. 한쪽은 방 앞쪽으로 바닥이 높은 베란다를 설치하였고, 반대쪽은 베란다 없이 유리 창문을 달아두었다. 이 정면 모습이 농가와 달리 보이게 하는 이유이다. 수덕여관 앞 오른쪽 옆에는 1969년 작곡가 윤이상을 비롯한 예술인, 유학생들이 서독에서 유학할 당시에 비롯된 동백림사건으로 1967년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2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 나와 요양하며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적 추상으로 표현한 작품인 암각화가 있다. 이 작품은 덕숭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는 수덕사의 장엄함과 여승의 청아함, 수덕여관의 초가지붕, 노송, 그리고 그 앞의 계곡과 함께 어우러져 그 멋을 더하고 있다. 수덕여관과 우물, 암각화를 포함한 일대 1,504.15㎡가 1996년 충청남도기념물로 지정되어 근대사의 한 장면을 기록해 주고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또한, 수덕여관은 수원 출신의 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이 3년간 묵었던 곳이기도 하다. 나혜석은 염상섭, 김일엽 등과 폐허 <동인>을 창간했으나, 1948년 행로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 신여성이다. 나혜석은 20세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주요 작품은 <농부>와 <자화상>과 <스페인 해수욕장>이 있다. 호는 정월이고 서울 경기에서 태어나 오빠의 권유로 미술을 시작했으며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글을 쓰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는 등 진보적인 성격을 지녔다. 다양한 국가를 여행하면서 야수파 형식의 그림을 그렸고 귀국 후에는 사회에 저항하는 글을 썼지만 무시당했다. 생활고에 시달려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랑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이응로 화백은 서양화의 대가 나혜석이 수덕사에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 수덕여관에서 나혜석을 찾아가 그녀의 수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나혜석은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1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 전시회로,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낙역부절하여 인산인해"(絡繹不絶人山人海)였다고 한다. 1923년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거주했다.

  

또 하나의 인물은 비구니 김일엽 스님이다. 승려가 되겠다고 찾아온 나혜석을 단칼에 거절하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김일엽 스님의 본명은 원주(元周), 호는 일엽(一葉)이며, 평안남도 용강 출신이고 아버지는 목사(牧師) 김용겸(金用兼)이다. 아버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관계로 20대까지는 교회에 다니며 성장하였다. 그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일찍 개화하였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세학교(救世學校)와 진남포 삼숭학교(三崇學校)를 거쳐 서울 이화학당에서 수학하였다.

  

또한 일본에 건너가 닛신학교[日新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하여 스스로 주간이 되기도 하였으며, 동아일보사 문예부기자, 『불교(佛敎)』지의 문화부장 등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신자였으나 1928년 만공선사(滿空禪師) 문하에서 득도 수계(受戒)하고 불교 신앙으로 전향하게 되어 만공이 있던 예산 수덕사(修德寺)에 입산, 수도하는 불제자로 일생을 마쳤다. 우리나라 근대문학 초기에 여성으로서 대담한 사회활동과 아울러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오랫동안 폐쇄된 규범 속에 묻혀 있어야 하였던 우리나라 여성들이 사회 진출과 문학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