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배움의 기쁨/풍수학 공부

경기도 여주군 세종대왕릉 영릉(英陵)

아진돌 2013. 5. 1. 16:58

 

2013년 4월 7일 충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풍수학을 같이 공부했던 도반들과 함께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로 243번지(능서면 왕대리 산83-1) 소재 영릉(英陵)을 다녀왔다. 이곳에는 세종대왕릉인 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인 영릉(寧陵)이 같이 있는 곳이다.

영릉(英陵)은 세종(世宗)(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1395-1446)의 합장릉이다. 하나의 봉분 아래에 두 분의 광을 마련한 동봉이실의 합장릉으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이다. 영릉은 세종대왕의 명성 만큼이나 유명한 왕릉이다. 이 묘는 예종 원년(1469년)에 태종의 릉인 헌릉(獻陵) 서쪽에 있던 능을 이장한 후 합장릉으로 조성한 묘이다(문화재청, 영릉·영릉 팜를렛).

세종은 당시의 최고 권위기관인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풍수서를 연구시키기도 하고 지리서를 간행 반포한 일도 있으며 사신들을 통해서 지리서들을 수입하기도 하였다. 세종께서 재위시의 수릉지(壽陵地)로는 광주의 태종릉인 헌릉(獻陵) 서쪽에 정혈 되었다. 세종은 아버지인 태종의 옆에 영면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수릉(壽陵)이란 왕이 살아 있는 동안에 미리 마련해두는 무덤을 말한다. 태조(太祖)는 일찍부터 자기의 수릉지를 살펴보았고, 이러한 선례는 역대 왕들에게 계승되었다. 세종도 자신의 수릉을 상지(相地)하기 위하여 풍수인을 동원시켰다. 풍수인들이 선정한 세종의 수릉지는 태종의 능 서혈(西穴)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풍수인이었던 최양선은 수능 주혈이 감락(坎落)이고 곤수(坤水)라 흉지라고 주장하게 된다. 풍수인들이 면밀히 검토한 결과 감락(坎落)이 아니고 임락(壬落)이라고 바로 잡는다. 세종의 수릉지는 헌릉 서혈로 결정되었고 왕이 죽자 그 곳에 안장하였다(이상태. 1987. 조선초기의 풍수지리사상. 사학연구 제39호. 한국사학회).

세조 때에 영릉이 길지가 아니니 길지를 찾아 천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이 다시 나온다. 세조는 서거정(徐居正)을 불러 물은 즉 그가 대답하여 가뢰되, ‘산수의 방위를 가지고 자손의 화목을 삼는 일에 대해서 신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천장(遷葬)을 하여 복을 얻으려 한다니 왕으로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고 원하겠습니까?’ 그러자 왕은 ‘과인도 천릉할 생각이 없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세조때는 천릉이 중지되었다. 그런데 예종 원년(1469)에 고경(古經) 즉, 청오경을 들어 다시 영릉을 개천(改遷)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예종은 이를 군신에게 논의하게 했고, 재상(宰相)을 각지에 보내 개장에 알맞은 길지를 찾아보도록 했다(무라야마 지쥰, 정현우 역. 한국의 풍수, 원저: 朝鮮の 風水).

예종실록에 따르면 영릉(英陵)은 지금의 영릉 자리에 있던 이계전, 이인손 등의 묘를 옮기게 한후 이장한 것이다. 영릉(英陵)에 대한 풍수인들의 견해는 크게 갈리고 있다. 최영주는 ‘신한국풍수’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세종의 영릉은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영릉으로 인해 조선 왕조의 국운이 1백년 더 연장되었다는 평이 나올 만큼 지관들 사이에서는 길지로 꼽힌다. 굳이 풍수지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영릉의 곡장(봉분 뒤의 담장) 뒤에 앉으면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마음의 평화는 물론 행복감에 빠져들게 된다. 코 끝에 와 닿는 바람은 내장까지 시원하게 씻어주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인간이 꿈꾸는 유토피아의 세계, 바로 그 곳임을 일깨워준다(최영주, 신한국풍수)(이태호. 1999. 새로쓰는 풍수지리학에서 재인용).

이태호(1999)는 이천, 여주군에 기상이 출중한 산이 없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오방(午方)에 혈을 넘겨다 보는 규사(窺砂)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뛰어난 명당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영릉을 수강산약(水强山弱)의 형세라고 주장하고, 영릉이 자좌(子坐)이면 안산이 비게 되므로 계좌(癸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산의 위치로 보아 자입수(子入首)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보고 있다(이태호. 1999. 새로쓰는 풍수지리학).

우리가 보기에는 확실한 자좌오향(子坐午向)이다. 계좌정향으로 볼수도 있지만 조선초에는 풍수사들이 계좌정향을 꺼리고 있었다는 기록과 왕릉들이 자좌(子坐)로 자리한 것들을 보면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조선 초기에는 신(申)득수, 자(子)입수, 진(辰)파구로 이루어지는 신자진(申子辰) 삼합법에 따라 묘를 쓴 예가 많다. 비슷한 시기에 쓴 천안시 수신면의 한명회 묘에서도 신자진 삼합법에 따른 예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