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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의 왕릉

아진돌 2013. 5. 1. 17:15

 

2013년 4월 7일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로에 있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英陵)과 효종대왕릉과 인선왕후릉인 영릉(寧陵)을 다녀왔다. 조선 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 여년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문화재청, 영릉·영릉 팜플렛)

조선 왕실의 왕릉들은 경기지역의 사방 백리를 벗어날 수 없도록 하였다. 왕들이 먼 길을 왕래하면서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게 하려는 개국공신들의 의도가 깔려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왕릉들은 서울 지역에 있어서 고등학교 때까지는 소풍도 가고 자주 놀러도 가던 곳이었으나, 대전으로 내려온 후에 또 풍수학을 공부한 후에는 처음으로 가본 왕릉이다. 이번 기회에 조선의 왕릉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영릉에 갔을 때 받은 팜플렛(문화재청 세종대왕 유적관리소 발행)을 기준으로 석물 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으며, 참고로 무라야마 지쥰 저(정현우 역) 한국의 풍수(원저 : 朝鮮の 風水)의 관련 내용을 발췌하여 뒤에 붙였다.

조선의 릉은 입구에서부터 크게 진입공간, 제향공간, 능침공간으로 구분된다. 진입공간에는 재실(齋室)이 있다.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한다. 효종대왕의 릉인 영릉(寧陵)의 재실은 원형 보존이 잘되어 있어서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입공간에서 홍살문이 있는 제향공간으로 들어가는 곳에 금천교(禁川橋)가 있다. 왕릉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도록 물길이 잡혀 있고 이를 금천(禁川)이라 한다. 금천을 건너는 다리를 금천교라 하며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한다. 금천교 앞쪽으로는 연지(淵池)라는 연못을 만들며 앞에 밭이 있을 때는 필요하지 않다.

금천교를 건너면 일반적으로 홍살문이라 부르는 붉은 색의 홍전문(紅箭門)을 만난다. 홍살문을 바라보고 우측에는 가로 세로 1m 정도의 돌로 포장한 판위(版位)가 있다. 제관들이 절을 올리던 곳으로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은 판위에서 절을 올리고 정자각(丁字閣)으로 향한다. 홍전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을 참도(參道)라 한다. 박석을 깔아 놓았으며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神道)라 하고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만이 다닐수 있는 길이다. 오른 쪽의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御道)라고 한다. 요즈음은 전통을 배우진 못한 탓에 이 길을 아무나 거리낌 없이 다닌다. 심지어 애완견과 함께 이 길을 걷는 관광객들을 보면 아는 게 죄라고 심사가 불편해진다. 개가 신도를 걷는걸 보면 선왕의 혼령은 이해하실까?

능 앞에서 제례를 올리는 곳이 정자각(丁字閣)이다. 한자 丁자를 닮은 건물이며 제례때 제물을 진설하고 제례를 드리던 곳이며 제향을 올릴때 왕의 신주를 이 곳에 모신다. 정자각 뒤쪽의 문은 제례를 올릴때 열어 놓게 되며, 정자각 안에는 제상(祭床), 향상(香床), 축상(祝床)이 놓여 있다. 정자각에는 동쪽과 서쪽에만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제례의식이 동쪽에서 진입하여 서쪽으로 내려온다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진행됨을 의미한다. 정자각 서쪽 뒤편에는 제문(祭文)을 태우는 자리로 망료위(望燎位)라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정자각 서편 앞쪽에는 제례 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는 수라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 동쪽 앞쪽에는 수복방(守僕房)이 있다. 제기(祭器)를 보관하거나, 능을 지키는 관리인 수릉관(守陵官)이나 능을 청소하는 일을 맡아하는 노비인 수복(守僕)이 거처하던 곳이다. 정자각 동쪽 뒤쪽에는 비석이나 공적비 등이 있는 비각(碑閣)이 있다. 정자각 동쪽 뒤편에는 산신제를 올리는 산신석이 있다. 일반인들의 묘에서는 보통 산신석이 묘의 위쪽에 설치되나 왕릉에서는 제향공간에 설치된다. 이 땅에서는 산신보다도 임금님이 높으신 까닭이다. 홍살문에서부터 정자각 뒤편의 망료위와 산신석까지의 공간을 제향공간이라 한다.

능을 올라가는 길목부터는 능침공간이라 하며, 봉분이 있는 높은 곳에서부터 상계, 중계, 하계로 구분되어 층을 이루고 있다. 능침공간을 능의 뒤편에서부터 설명하기로 한다. 능침의 동서쪽과 북쪽 즉 3면은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곡장(曲墻)으로 부르는 담장으로 둘러 쌓는다. 능침에는 12 개의 지대석을 세우고 12 면의 중간에는 난간석이 있으며, 재위중에 병란을 겪운 왕에게는 능의 위 둘레에 병풍처럼 돌려 세우는 직사각형의 병풍석(屛風石)을 설치하고 병풍석을 안쓸 경우에는 사대석(莎臺石)을 쓴다.

능침의 양 옆에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번갈아 세워 능을 보호하도록 한다. 영릉(英陵)에는 양쪽에 각각 석호 두 마리와 석양 두 마리씩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 앞에는 영혼이 노는 혼유석(魂游石)이 있다. 보통 재실이 없는 묘에서는 제물을 차리는 상석이 있고 상석 뒤쪽에 혼유석이 있으나, 왕릉과 같이 제례를 지내는 정자각이 있는 능 앞에 있는 큰 석상은 혼유석이다. 세종대왕릉에는 왕비와의 합장릉이라 두 개의 혼유석이 놓여 있고, 효종대왕릉에는 한 개의 혼유석이 놓여 있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4개의 대석을 고석(鼓石)이라 한다. 혼유석 양쪽에는 망주석이 설치된다. 여기까지가 능침공간의 상계이다.

혼유석이 설치된 상계보다 조금 낮은 곳이 중계이며 중앙에는 장명등이 있다. 참고로 서희 장군 묘에서 보듯이 고려초의 장명등은 구멍이 뚫려 있지 않으나 영릉의 장명등은 구멍이 뚫려 있다. 장명등 좌우 즉 동서에는 금관조복을 하고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서 있는 형상의 문신상(文臣像)인 문인석(文人石)-문석(文石)이라고도 한다-이 하나씩 설치되고 그 밖으로는 석마(石馬)가 문무신의 승용마(乘用馬)로 세워진다. 문석이 설치된 곳보다 조금 낮은 하계에는 무인석(武人石) 한 쌍과 석마 한쌍이 동서에 배치된다. 무인석은 문인석 아래에서 왕을 호위하고 있으며 두 손으로 장검을 짚고 위엄있는 자세로 서 있다. 상계의 석호와 석양은 능의 밖을 바라보는 형상이나, 석마는 문무석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설치되어 있다(문화재청, 영릉·영릉 팜를렛).

조선의 왕릉은 언제나 뒤에 산을 업고 그 중복에 분릉을 구축하고, 용호의 세를 가진 언덕이 그 좌우에 옹립하고, 남쪽 평야를 넘어 멀리 조산을 조망하고, 능역의 주위는 노송(老松)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가장 좋은 경관을 점하고 있다. 참배하는 길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돌다리를 거쳐 정자각(丁字閣)에 이른다. 그 앞에는 동서에 수복방(守僕房), 수라간(水刺間) 등이 있고, 동방에 비각이 서 있다. 정자각의 후방을 좀 올라가면 분릉 앞에 도달한다. 봉분 주위는 석란간(石欄干)으로 둘러싸이고 그 앞에 석상(石床)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이 서있다. 주위에는 석양(石羊)·석호(石虎)를 번갈아 배치하여 밖을 향하게 하고 이것이 능을 수호하는 것처럼 만들고, 석상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을 세우고 분의 동·서·북의 3면에는 곡장(曲墻)을 둘렀다. 분의 앞쪽 한 층 낮은 곳에 동서로 문석(文石) 한 쌍 또는 두 쌍을 세우고, 또 한층 낮은 곳에는 무석(武石)을 한 쌍 또는 두 쌍을 세우고 문무석인(文武石人)의 뒤에는 각각 석마(石馬)를 세운다(무라야마 지쥰, 정현우 역. 한국의 풍수, 원저: 朝鮮の 風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