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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 선운사 백파대사비

아진돌 2017. 10. 1. 16:41

2017815일 광복절 휴일을 맞아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있는 선운사의 부도전(浮屠殿)에서 담았다. 앞의 두 장의 사진은 이번 답사에서 담았고, 뒷부분의 사진들은 2010919일에 담았던 비문 사진들이다. 이 비는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 직접 비문을 짓고 쓴 비로서 추사 선생의 힘찬 글씨를 접할 수 있는 비이다. 선운사에 갈 때마다 부도전에 들르지만 어떤 때는 확연히 구분되는 백파대사비를 찾는데 애를 먹기도 한 기억이 있다.

 

백파율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이 비석은 선운사 입구로 들어서서 오른쪽 숲 속의 부도 밭에 세워져 있다. 이 비의 전면에는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라고 쓰여 있다. 대기대용(大機大用) 글자 중에서 용()자가 특이하게 쓰여 있다. 비 뒷면에 새겨진 비문 마지막에는 阮堂學士金正喜撰幷書 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이라고 적혀 있다. 완당학사 김정희(阮堂學士 金正喜) 선생은 충남 예산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 김씨이고,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노(果老농장인(農丈人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다양하다. 이 비문에서는 완당을 쓰셨다. 숭정(崇禎)은 명나라 개국 후 첫번째 연호이고 명나라가 세워진 1628년이 숭정 1년이다. 1678년이 무오년이므로 명나라 개국 이후 네 번째 무오(戊午)년은 1858년 철종 9년에 해당한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 시대에도 청나라를 우습게 보고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던 조선말 선비들의 풍습을 엿볼 수 있다.

 

인터넷을 검색하는 중에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http://cafe.daum.net/jangdalsoo를 알게 되었다. 이 카페에서 비문의 내용을 요약한 글을 보면,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며,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팔십 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기 때문에 비문의 제목을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를 지음에 있어,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로서 부족할 것이기에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巖) 등 백파의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고 하였다.(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http://cafe.daum.net/jangdalsoo)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에는 비문의 전체 글과 번역문이 게시되어 있다. 참고로 여기에 출처를 밝히고 전제하면 다음과 같다.

(원문)

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

 

我東近無律師一宗惟白坡可以當之故以律師書之大機大用是白坡八十

年藉手著力處或有以機用杀活支離穿鑿是大不然凡對治凡夫者無處非

殺活機用雖大藏八萬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特人不知此義妄以殺

活機用爲白坡拘執着相者是皆蜉蝣撼樹也是烏足以知白坡也昔與白坡

頗有往復辨難者卽與世人所妄議者大異此個處惟坡與吾知之難萬般苦

口說人皆不解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今作白坡碑面字若不大書

特書於大機大用一句不足爲白坡碑也畫正雪竇白巖諸門徒果老記付

貧無卓錐氣壓須彌事親如事佛家風最眞實厥名兮互璇不可說轉轉

阮堂學士金正喜撰幷書

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

 

(번역문)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한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것에 해당할 만하다. 그러므로 율사로 썼다.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80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다. 혹자는 기(), ()을 살(), ()로 지리멸렬하게 천착(穿鑿)하기도 하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릇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자는 어디에서건 살, , , 용이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팔만대장경이라 하더라도 살, , , 용의 밖으로 벗어나는 것은 한 가지 법도 없다. 다만 사람들이 그 의리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이 살, , , 용을 백파를 구속했던 착상으로 여긴다면 이는 모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것과 다름없으니 이것이 어찌 백파를 충분히 아는 것이겠는가.

 

예전에 백파와 더불어 자못 왕복하면서 어려운 문제를 분변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곳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아는 것이니 비록 온갖 말을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모두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율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오게 하여 서로 마주하여 한번 웃을 수 있겠는가. 지금 백파의 비석에 새길 글자를 지음에 만약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한 구절을 큰 글씨로 특별히 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로서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써서 설두(薛竇)와 백암(白巖)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인다. 다음과 같이 써서 붙인다.

 

가난하기로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기개는 수미산(須彌山)을 누를 만하였네.

부모 섬기기를 부처 섬기듯 하매

가풍(家風)이 가장 진실하도다.

그 이름 긍선(亘璇)이니

전전(轉轉)한다 말할 수 없다네.

 

완당(阮堂) 학사(學士) 김정희(金正喜)가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

숭정기원후 네 번째 무오년(철종 9, 1858) 5월 일 건립하다.

(글주소 : http://cafe.daum.net/jangdalsoo/dlwg/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