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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합천 해인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1. 6. 19. 18:56

2021년 6월 13일(일)에 대한불교 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12번째 답사지로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가야면 치인리 10)에 있는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에 다녀왔다. 가야산 국립공원 서남쪽에 위치한 해인사는 의상대사의 화엄10찰(華嚴十刹)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안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 수도도량이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널리 반포할 목적으로 간행한 기록을 모두 대장경(大藏經)이라 칭한다. 대장경은 일체경(一切經), 삼장경(三臧經) 또는 장경(藏經)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삼장으로 구성된다. 세계적으로는 20여 종의 대장경이 있지만 교정을 철저히 하여 정확도가 높고 완성도가 높은 면에서도 다른 대장경이 따라 올 수 없는 완벽한 대장경이 팔만대장경이다.(출처 : 해인사 홈페이지)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는 해인사 주차장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되돌아 나와서 성보박물관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를 주차하였다. 비교적 주차공간이 넓어서 좋았다. 성보박물관 뒤편으로 돌아가면 허덕교를 건너게 된다. 예전처럼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여기까지 올라오면 허덕허덕 거린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옆쪽으로 계곡물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가다 보면 성철스님의 부도탑 등 고승들의 사리탑과 행적비 등이 잘 정리되어 있는 부도전을 만난다. 부도전을 지나면 길상탑(吉祥塔)을 만난다. 이 탑은 백용성 스님의 사리탑의 모델이 된 탑이라고 한다. 일주문 근처에는 가야국 김수로왕과 허황후와 연관된 영지를 만난다. 김수로왕과 허황후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그리워하자 이 영지에 아들들의 얼굴이 비쳤다는 설화는 경남 하동군에 있는 지리산 칠불사에도 똑같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목들이 있는 길을 따라 일주문을 지나면 구광루와 범종루가 있는 마당에 오르게 된다. 구광루 뒤로 들어가면 예불공간이다. 석등과 3층석탑 뒤로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이 모셔져 있는 대적광전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대적광전에는 사면마다 서로 다른 현판이 걸려 있다. 대전광전 옆에는 비로자나불 두 분이 나란히 모셔져 있는 대비로전이 있다. 대비로전 앞뜰 양쪽에는 만첩빈도리 두 그루가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대전광전 뒤에는 장경판전(藏經板殿)이 있다. 장경판전은 별도로 아래에 포스팅하였다. 해인사 답사를 준비하면서 해인사 홈페이지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에서 수집한 해인사에 대한 자료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해인사의 창건 기록은 비교적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 태조 26년에 간행된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은 해인사의 창건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해인사 홈페이지(http://www.haeinsa.or.kr/)에 따르면,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년) 10월 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고 한다.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930년 경(고려 태조)에 희랑대사에 의해 확장되고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1398년(조선 태조 7년)에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뒤 세조는 장경각(藏經閣)을 확장하고 개수하였다. 이때부터 해인사는 법보종찰로 유명하게 되었다.

 

해인사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시기는 대체로 조선 성종 12년(1481년)에서 21년(1490년) 사이라고 본다. 성종 19년(1488년) 덕종의 비 인수(仁粹)왕비와 예종의 계비 인혜(仁惠)왕비가 선왕의 뜻을 받들어 도목수 박중석(朴仲石) 등을 보내어 학조(學祖)대사로 하여금 판전 30칸을 짓게 하고 보안당이라 이름을 붙였다. 1490년까지 많은 전각과 요사 등 160여칸을 완성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종 22년(1491년)에 조위(曺偉)가 쓴 『해인사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해인사는 임진왜란 때도 전화(戰禍)를 면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다. 1695년 이후 1871년까지 해인사에는 일곱 번의 큰 화재가 있었으나 판전 건물은 피해가 없었다. 해인사에서 비교적 오랜 건물은 대적광전, 응진전, 퇴설당, 구광루, 해탈문 등이며 대장경판전 외에는 모두 순조 17년(1817년) 직후의 건물이고 나머지 건물은 훨씬 후의 건물들이다.(출처 : 해인사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해인사는 현재 말사 172개와 부속 암자 16개를 거느리고 있는 법보종찰이며, 선원(禪院)·강원(講院)·율원(律院) 등을 갖춘 총림(叢林)으로서 한국불교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이 절의 당우로는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극락전·관음전·응진전·조사전·퇴설당(堆雪堂)·청화당(淸和堂)·궁현당(窮玄堂)·구광루(九光樓)·경학원(經學院)·선원·우화당·보경당·적묵당·선열당·사운당(四雲堂)·독성각·해탈문·봉황문(鳳皇門)·일주문(一柱門) 등이 있다.

 

이 절에 소장된 중요 문화재로는 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 장경판전(국보 제52호),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13(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周本卷十三, 국보 제265호),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권74(국보 제279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합천 해인사 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 원당암(願堂庵) 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陜川 般若寺址 元景王師碑, 보물 제128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 해인사 영산회상도(보물 제1273호), 사간장경 중의 보물 다수 등이 있다.(인용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소개된 주요 당우들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여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해인사가 화엄종 사찰이므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은 해인사의 중심 법당이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상, 보현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본래 성주군 금당사(金塘寺)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이 절이 폐사될 때에 용기사(龍起寺)로 옮겨졌다가 1897년 범운(梵雲)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봉안되었으며, 원래부터 있던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지장보살·보현보살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장경각은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해 둔 2개의 판전으로서, 경판의 보관을 위한 가장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걸작으로 인정받는 건물이다. 이 장경각은 1995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그 안에 소장된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200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명부전에는 목조지장보살 및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다. 지금 건물은 1873년(고종 10)에 지어졌다. 현재 율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극락전은 독립된 산내 암자로서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관음전(觀音殿)은 심검당(尋劍堂)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내부에는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나한전이라고도 불리는 응진전은 1488년(성종 19) 학조대사가 창건하여 역대선사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현재 건물은 1817년 성안대사가 중건한 것이다. 일명 조사전이라고도 불리는 해행당(解行堂)은 1817년에 제월선사가 퇴설당을 중창할 때 함께 중창하고 수선사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처음에는 선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이회광이 주지로 있을 때 선객들이 드세다 하여 수선사를 폐하고 조사전이라고 이름을 바꾸면서 개산조 이하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셔 왔다.(인용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