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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안골왜성을 둘러보다.

아진돌 2025. 1. 31. 12:05

2025년 1월 24일(금)에 남파랑길 창원 구간 6코스를 걷는 중에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 산27번지 외에 있는 창원 안골왜성을 둘러 보았다. 경상남도 진해시 안골동에 있는 이 성은 동망산 정상 위에 만들어졌다. 창원 안골왜성(昌原 安骨倭城)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일본식 성곽(왜성)이다. 외견상으로나 축조수법, 혹은 시설에서 당시 일본의 성곽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출입구는 해변쪽으로 나있고, 출입구를 통과하는 적에게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창원 지방에만도 창원 웅천왜성(昌原 熊川倭城)과 웅천왜성의 지성인 창원 자마산성(昌原 子馬山城), 창원 명동왜성(昌原 明洞倭城)이 있고, 일본 수군의 제1수군기지였던 이곳 창원 안골왜성(昌原 安骨倭城)이 있다.

 

안골왜성은 1593년부터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가 축성을 지휘하였으며, 축성 후에는 축성을 지휘한 세 장수가 1년씩 교대로 수비를 담당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였다. 해전에서 거듭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보급로의 확보와 우리의 수군을 막기 위한 최후의 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1591년에 일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6~1598)는 세력이 큰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 화려한 오사카성을 축조하고 1585년 일본을 통일한 후 1590년 조선통신사를 통해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고 명나라로 가는 길을 안내하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한다. 1591년에 시작된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 7년간 전쟁을 치르며 중국, 조선, 일본은 모두가 큰 손실을 입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머물러야 했다. 해상에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바다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 수군들은 왜성을 쌓아 방어전을 하고 있었다. 이데요시가 죽은 후에야 일본 수군은 일본으로 촐수할 수 있었다.

 

창원 안골왜성의 둘레는 594m이며,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이다. 동망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본성, 제1외곽, 제2외곽을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곽의 축조에는 5만 명가량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에게 끌여와 성을 쌓았을 우리 선조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는가. 성의 출입은 육지 쪽을 막고 바닷길을 이용하기 위하여 바닷가에 이르도록 해자를 파서 교통로로 이용하였는데, 해안으로 드나들기 위한 통로가 만들어진 것도 왜성이 가지는 특징이다.

 

▲ 해안가로 나 있는 본성의 입구
▲ 본성
▲ 제2외성 입구
▲제2외성
▲제2외성에서 내려다 본 안골포
▲제3외성 입구
▲제3외성에서 바라본 안골포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