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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기쁨/풍수학 공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안동 김씨 김번의 묘 관산을 다녀오다

아진돌 2015. 7. 23. 16:11

2015531() 충남대학교 평생교육원 풍수지리사 전문과정 도반들과 함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석실로 336번길 11-63(와부읍 덕소리 산 5번지)에 있는 안동 김씨 김번(金璠, 1479-1544)의 묘와 인근의 김번의 후손들의 묘를 관산하였다. 야트막한 산의 중턱에 호리병처럼 돌출된 지형에 위치하고 있었고, 묘 옆의 기슭에는 주말농장으로 분양된 텃밭에서 여러 가지 푸성귀들이 자라고 있었다.

 

김번의 묘는 조선의 8대 명당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옥 항아리에 물을 담은 형국이라는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 명당으로 유명하다. 좌수우류로 정미파구(丁未破口)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좌수(左水)가 우()로 흘러 을신정계방(乙辛丁癸方)으로 흘러가나 왕향(旺向)을 세우지 못할 때 사용하는 향법인 자왕향(自旺向)을 적용하였다. 자왕향은 부귀가 대발하고 인정이 흥왕하며 수려한 자녀가 많이 나고 대길대창 한다(유곡 김진철(2008), 해동풍수지리학, 충북: 정안종합상사). 그러나 이 명당은 이기론 보다는 형국론 차원에서 조선 8대 명당으로 불리는 듯하다.

 

이 묏자리는 원래 김번의 부인인 남양 홍씨 가문의 땅으로 방앗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방앗간 자리를 묏자리로 정한 사람은 김번의 큰 아버지로 김번이 죽을 때 회암사(檜巖寺) 주지였던 학조대사(學照大師)가 정한 것이라 한다. 학조대사는 일찍 출가하여 세조 때 국사(國師)로서 불경을 국어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일과 해인사 중창에 간여하였다고 한다. 명당 설화에 의하면 뒤늦게 이곳이 명당임을 알게 된 남양 홍씨 가문에서는 몰래 물을 갖다 붓고 물이 많아 묏자리로 쓸수 없는 땅이라고 하였으나 김번의 부인이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광중을 파던 중 황금색 자갈이 많이 나와서 인부들이 이를 전부 걷어냈는데, 이를 본 학조대사가 노란 자갈은 금괴이고 하얀 자갈은 은괴라고 하며 자갈 하나가 벼슬 한 자리이니 욕심내지 말고 적당히 넣으라 하나 집어넣은 금괴가 21개라 그의 후손 중에서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정승이 15, 대제학이 6명이 나왔다는 설도 있다.

 

김번의 묘는 조선왕조 말에 있었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와 관련되어 있다.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된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이 김번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정조의 죽음으로 순조가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당시 왕을 보좌하던 김조순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으면서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의 집안인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송창섭·김남윤·윤대원(2014), 한국사의 이해, 서울: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김번은 1479년 숙종 때 태어나 66세에 타계하였다. 중종 8(15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士官)이 되었으며 지금의 부시장에 해당하는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역임하던 1523년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농업에 힘썼으며, 뒤에 요승 학조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화를 면했다 한다. 김번의 후손들이 중앙 무대에 등장하는 시기는 번의 손자인 극효(克孝)가 당시 좌의정 정유길의 사위가 되면서 부터이다. 정유길의 다른 딸이 광해군의 장인인 류자신(柳自新)에게 시집을 가면서 극효는 그와 동서지간이 되었고, 이때부터 안동김씨가 조선의 중앙 무대에 등장하는 시초로 극효(克孝)는 안동김씨의 중시조가 된다 (http://blog.naver.com/casteert/220056802620). 김번 아래로 정승 15, 왕비 3, 대제학 6, 판서 35, 청백리 3, 등과자 300명을 배출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