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배움의 기쁨/풍수학 공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우암 송시열 선생 묘에 다녀오다

아진돌 2015. 11. 8. 14:39

 

2015111() 대성풍수지리원 원우들의 소모임인 충남대학교 평생교육원 풍수지리반 도반들과 함께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청천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묘를 다녀왔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묘는 원래 수원의 무봉산에 있었으나 영조 33(1757)에 이 곳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신도비를 지나 왼쪽의 돌계단 길을 올라가면 커다란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잡고 있고 전면에는 화형산(火刑山)들이 높이 솟아 있다. 숲이 우거져 풍수의 기본이 되는 득수와 파구의 방향을 알아보지 못해 향법을 따지지 못했다.

이 묘에 대한 평가는 우암 송시열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극과 극을 이룬다. 묘를 쓴 곳이 주산으로부터 내려오는 행룡(行龍)이 멈춘 곳이 아니고 서로 갈라져 나가는 곳이라 생기가 모일 수가 없다는 설이 있다. 한편으로는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으로 우리나라 100대 명당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풍수설화에 따르면 장군대좌형인데 앞쪽에 병사들에 해당되는 산들이 없어 발복이 되지 않으므로 후손들이 300냥을 기부하여 청천시장을 열게 하여 사람들이 모여들게 하였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은진 송씨로 조선시대 노론의 영수이며 인조 11(1633)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 추후 효종이 되신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며 현종 때에 좌의정에 올랐다. 숙종 15(1689)에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로 귀양 갔다가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압송되던 도중에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추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우암(尤庵) 송시열은 우암이라는 호를 얻게 된 연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인의 주장을 굽힌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하며 고집이 강했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으로 노론의 영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귀양 보내기도 하고 본인도 귀양을 떠나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우암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명나라가 망한 후 주자학의 중심이 한반도가 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주자(朱子)와 비교하여 송자(宋子)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고, 당쟁의 원흉이고 신흥국인 청나라를 배척하고 멸망해가는 명나라만을 흠모하였으며, 만동묘 등을 세우는 등 사대사상의 극을 보여주었다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83세의 노인이 된 우암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실 때의 모습을 기록한 글도 가끔씩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