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배움의 기쁨/풍수학 공부

경북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 정사 묘를 다녀오다.

아진돌 2017. 4. 29. 15:56

2017416() 풍수도반들과 함께, 일주일 후인 423일에는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대풍련) 공동간산 행사에 참여하여 경북 예천군 지보면 도장리에 있는 동래 정씨 정사(鄭賜) 묘를 둘러 보았다.

   

정사(鄭賜, 14001453) 선생은 정종 2년에 태어나 단종 원년에 돌아가신 분으로 1420(세종 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이어서 식년문과에 병과(문과 급제자 33명을 갑과 3, 을과 7, 병과 23명으로 구분한 등급의 병과)로 급제하였다. 감찰, 정언, 검열 등을 역임하고 이조, 예조, 형조의 낭관을 지냈다.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 30(1448) 46일에 수예문직제학(守藝文直提學) 정사(鄭賜)를 경상도에 보내어 왜인(倭人)이 싸 가지고 온 단목(丹木((()의 품질의 등수를 정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진주목사를 지내면서 고을을 잘 다스려 경상도 용궁의 완담향사(浣潭鄕祠)에 정광필(鄭光弼) 등과 함께 봉안되었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에 있는 이 정사(鄭賜) 묘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동에서 있는 동래 정씨 시조 묘와 함께 조선 8대 명당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는 자료를 보면 정사의 후손에서 정승이 13명 나왔고, 문과 급제 123명이 배출된 곳이라고 한다. 우리가 묘에서 볼 때는 계좌정향(癸坐丁向)이고 대강(大江)은 좌수우류이고 곤파(坤破)이며 정묘향이다. 종친회장의 말로는 내()는 자좌오향(子坐午向)이라고 한다.

  

이 자리는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는 형국으로 옥녀측와형국(玉女側臥形局) 또는 옥녀개각형국(玉女開脚形局)이라고 불리며, 옥녀가 남자와의 관계를 위해 단정히 앉아 자세를 취한 모습이라 하여 옥녀단좌형(玉女端坐形)이라고도 불린다. 묘혈은 여자의 자궁에 해당되는 곳이라고 하며 묘 양쪽에는 유방을 형상화한 듯 작은 무덤이 만들어져 있다.

  

2017423일에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대풍련) 공동 간산시에 유곡 김진철 감사는 이 묘 바로 위가 제왕지지(帝王之地)로 좋은 자리라고 소개하시며 그 당시에는 쓸 수가 없는 혈자리이고 바로 밑에 자궁 자리에 이처럼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는 점을 말씀하셨다. 묘 뒤쪽으로 올라가 보니 큰 혈을 맺기 위해 속기된 곳 바로 앞에는 큰 묘인 듯한 비룡이 있었고 예전에 고분인줄 알고 도굴꾼들이 파헤친 구덩이가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혈맥을 끊으려는 시도로 파헤쳐 놓은 듯하여 씁쓸하였다.

  

423일 공동간산때 배포된 대한민국 풍수지리연합회 제12차 공동간산 자료집에 수록된 남궁승 초대 회장님이 전하는 묘지 설화가 흥미롭다. 남궁승 회장님의 종합평(綜合評) 부분을 전제하면 다음과 같다(편의상 한자를 우리말로 옮긴다).

  

단정한 탐랑체(貪狼體) 주봉(主峰)에서 기복하고 속기하여 용격을 갖추고 중심으로 하강하여 와형혈처(窩形穴處)를 맺어 주고 좌우로 개각(開脚)하였으니 옥녀개각형(玉女開脚形)이라 한다. 우각은 곧게 뻗고 좌각은 하부를 안으로 오므렸으니 옥여개각의 형상 그대로이다. 앞으로는 위풍이 당당한 장군이 춤을 추는 앞에 옥녀가 다리를 벌리고 바라보니 음탕(淫蕩) 그대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상피(相避)(가까운 친척 관계인 남녀가 성적 관계를 맺는 일)를 붙을 때마다 자손 중에서 큰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묘주 정사공이 운명에 임박하자 자손을 불러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어느 곳에 사는 이씨를 찾아가 부탁하라.’ 하고 운명함에 따라 부친의 유언대로 그 이씨를 찾아가 부탁하니 그 이씨가 말하기를 내가 시키는대로 할 수 있겠느냐?’하고 다짐함에 하겠습니다.’고 답하니, 그러면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광중을 파다가 물이 난다하여 상여가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니 그 자리에 안장(安葬)을 하여라.’하고 말하였다. 이씨 말대로 강을 따라가 보니 과연 그대로 그런 장면이 연출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곳에 안장을 위해 물 위에 발을 치고 시신을 안장하다가 실수로 물속의 금붕어 눈을 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벼슬길에 나가게 되는 후손들은 모두 한 쪽 눈이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종친회장의 말로는 자기도 한 눈이 불편하며, 지금까지도 상피하면 큰 인물이 나며 한 쪽 눈에 이상이 있어 불편하다고 하니 풍수지리학적 자연의 묘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 간산을 마치고 종합평을 하시는 중에 물명당을 소개하시며 이 때 물은 찬물이 아니고 따뜻한 물이라고 덧붙여 주셨다. 이 풍수설화는 동래 정씨 시조묘의 풍수설화와 함께 별도로 풍수이론연구카페의 풍수설화집에 게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