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배움의 기쁨/풍수학 공부

경북 안동시 풍산읍 서애 유성룡 묘

아진돌 2017. 4. 30. 09:34

 

2017423일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에서 실시한 경북 안동과 예천 지역 공동관산에 참여하여 경북 안동시 풍산읍 수리 260번지에 있는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선생 묘를 다녀왔다. 이 묘는 우리가 보았을 때는 간() 입수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내당수는 우수좌류에 병파(丙破)이고, 외당수는 좌수우류에 정파(丁破)이다. 남궁승 회장께서는 자좌오향(子坐午向)에 내당수를 정파(丁破)로 보셨고 외당수를 곤파(坤破)로 보셨다. 유곡 선생은 청룡은 짧고 내백호와 외백호가 묘의 앞까지 감싸주어 장손보다는 차손 집안이 잘되는 차손봉사지지(次孫奉祀之地)로 간명하셨다. 특히 외당수가 달아나는 형국을 외백호가 잘 막아준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류성룡(1542-1607) 선생은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 사람으로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류중영(柳仲郢)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 25(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천거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힘썼다. 전쟁이 끝난 후 화의(和議)를 극력 주장했다하여 파직되었다.

 

류성룡 선생이 돌아가신 날인 선조40(1607) 513일의 선조실록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유성룡은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 사람이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어린 나이에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니 보는 사람들이 그릇으로 여겼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명예가 날로 드러났으나 아침 저녁 여가에 또 학문에 힘써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기대거나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 사람을 응접(應接)하는 즈음에는 고요하고 단아하여 말이 적었고 붓을 잡고 글을 쓸 때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문장이 정숙(精熟)하여 맛이 있었다. 여러 책을 박람(博覽)하여 외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한 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 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의리(義理)를 논설하는 데는 뭇 서적에 밝아 수미(首尾)가 정밀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을 때 중국의 선비들이 모여 들었으나 힐난(詰難)하지 못하고서는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고 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명예와 지위가 함께 드러나고 총애가 융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http://sillok.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