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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화엄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0. 6. 7. 09:13

2020년 5월 10일에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智異山) 남쪽 기슭에 있는 화엄사에 다녀왔다. 예전에 다녀온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모든 게 처음 보는 것 같다. 화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544년 백제 성왕 때 인도에서 온 연기조사에 이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화엄사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 따르면, 신라의 자장율사와 의상대사,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 등 여러 고승에 의해 중창되어 조선 세종 6년(1424년)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의 건물이 전소되고 주지였던 설홍대사는 300여 승려를 이끌고 왜군과 대항하다 전사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석조물을 제외하고 현재 남아있는 전각들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普濟樓)로 오르는 돌계단을 만난다. 보제루는 자연석을 다듬어 높게 쌓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다. 축대 아래쪽에는 승방과 강당 등의 수행공간이 있고, 보제루 앞마당에는 동탑과 서탑이 세워져 있다. 앞마당 위쪽은 예불공간으로 대웅전과 각황전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각황전 뒤로는 적멸보궁이 있는데 지금은 보수공사 중이라 탑을 모두 해체해 놓은 상태였다. 삼성각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해후소로 지금은 쓰지 않는 것 같다.

    

화엄사에 대한 소개 글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을 참고하기 바란다. 아래 글은 모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한 글이다. 창건에 대한 기록과 중수한 역사에 대한 부분은 생략하였고, 중건 역사에 대한 글 중에서 숙종이 사액한 각황전의 이야기를 포함하여 경내를 소개한 글을 여기에 옮긴다.

   

1702년(숙종 28)에는 각성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賜額)하고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격을 높였다.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1757년(영조 33) 대웅전을 중수했고, 1769년 각황전을 중수했다. 1798년(정조 22)과 1827년(순조 27)에 각각 적조당과 보제루를 중수했다.

   

1977년 각황전 해체보수를 완료했으며, 1984년부터 만월당·일주문을 세웠다. 1989년 원융료·청풍당을 짓고, 연기암을 복원했다.

   

화엄사의 현존 건물은 각성이 중건한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문수(文殊)·보현(普賢)의 동자상(童子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제3문인 천왕문(天王門)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 사천왕상(木刻四天王像)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濟樓)가 종루(鐘樓)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다. 동서 쌍탑(雙塔)의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으며, 이 밖에도 영산전(靈山殿)·나한전(羅漢殿)·원통전(圓通殿)·명부전(冥府殿)과 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및 요사(寮舍)인 원융료(元戎寮)·청풍당(淸風堂)·만월전(滿月殿)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299호인 구례화엄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三身)의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보물 제1363호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華嚴寺 大雄殿 三身佛幀)이 있다. 또한, 국보 제67호인 구례화엄사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나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제루(普濟樓)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石燈)과 사사자 삼층석탑(四獅子 三層石塔)·노주(露柱)·동서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석경 등의 중요한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의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높이 6.36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은 8각의 하대석(下臺石)이 병(甁) 모양의 간석(竿石)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臺上)에는 국보 제35호인 구례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히고 서 있는 승상(僧像)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사사자석탑은 창건주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孝臺)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통전 앞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方形)의 석단(石壇)을 받치고 있는데, 이를 흔히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는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양탑이 있다. 보물 제132호인 구례화엄사 동 오층석탑은 보물 제133호인 구례화엄사 서 오층석탑에 비하여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되어 있다. 서탑은 1995년에 해체하여 보수되었는데, 이때 진신사리와 더불어 4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필사본 다라니경과 불상을 찍어내는 청동불상주조틀 등이 있었다.

  

장륙전(숙종이 각황전으로 사액하기 이전의 이름: 블로거 아진돌이 추가함)의 사방 벽은 화엄석경(華嚴石經)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물 제1040호인 이 구례화엄사 화엄석경은 의상이 조성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화엄사가 세워진 경덕왕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많은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方塼) 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위에 있다. 글자체는 쌍계사 진감국사비(雙磎寺 眞鑑國師碑)를 닮았다.

   

화엄사 영산회 괘불탱은1653년(효종 4)에 조성된 것으로서, 1997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인 구층암석등과 교지[敎旨: 선조(宣祖)가 벽암선사(碧巖禪師)에게 하사] 1매, 예조사격(禮曹寺格) 1매, 예조홍각대사첩(禮曹弘覺大師帖) 1매, 겸팔도총섭첩(兼八道摠攝帖), 예조대선사각성첩(禮曹大禪師覺性帖) 1매가 있다(인용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화엄사에는 두 가지 기둥이 유명하다. 부속암자인 구층암에 있는 모과나무 기둥이고 다른 하나는 대웅전의 싸리나무 기둥이다. 송화가루가 많이 내려앉은 대웅전 내부를 닦으시던 보살님께 물어서 알게 된 대웅전 싸리나무는 만져보고 사진도 담았는데, 모과나무 기둥으로 유명한 화엄사 부속암자 구층암을 못 보고 온 것이 못내 아쉽다. 싸리나무라고 알려주시면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던 보살님의 말투가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왜 그러셨을까? 요즘 정토불교대학에서 마음 공부하면서 언짢은 마음이 생기면 알아차리라고 시험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혼자 웃고 말았다.

   

싸리나무 기둥? 싸리나무가 아름드리 나무로 클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자료를 찾아보니 아래와 같은 블로그 글을 보게 되었다. 블로그에 게시된 글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느티나무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아래 글은 블로그에서 인용한 글이다.

   

“천마총의 목관, 화엄사 및 통도사 대웅전,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기둥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가구까지 수많은 목질유물이 느티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느티나무 목질유물을 찾을 수 있다. 실제로는 느티나무가 왜 싸리나무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확실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필자의 추정은 느티나무의 재질이 사리함 등 불구(佛具)의 재료로 매우 적합하여 절에서도 흔히 사용한 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처음에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였든 느티나무를 사리(舍利)나무로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인용 출처: http://blog.daum.net/dang0520/2892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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