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경북 영천시 은해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1. 5. 20. 08:33

2021년 5월 17일(월)에 대한불교 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열 번째 답사지로 경북 영천시에 있는 팔공산 은해사(銀海寺)에 다녀왔다. 지난 2020년 10월 3일에 아홉 번째 답사지로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 다녀온 후 코로나19로 중단했다가 답사를 새로 시작하기로 하였다. 은해사(銀海寺)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 청통로 951(청통면 치일리 479)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다. 교구 본사 중에서 본존불로 극락보전(極樂寶殿)에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아미타불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계시다. 대웅전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지난 2021년 2월에 주지스님이 새로 임명되셨고 조실께서 새로 추대되셨다. 지난 5월 14일에는 삼천불전 점안식과 현판식을 가졌다고 한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사시 예불에 참석할 생각이었으나 월요일이라 구암역앞과 유성 톨게이트에 교통 체증이 여간 아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지도 않고 갔지만 예불 중간에 도착하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법당에 스님 한분과 보살 한분만 계셔서 법당 안에서 예불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곳은 가랑비가 계속 내려서 이동하는데 불편하였고 사진을 담는데 애를 먹었다. 팔공산에는 동화사와 은해사 두 교구 본사가 있다. 동화사는 당우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은해사는 모여 있어서 포근한 감을 주고 있다. 극락보전과 지장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있어서 웅장하게 느껴진다. 특히 지장전이 정사격형으로 지어져 있어서 내부가 무척 넓어서 인상적이다.

 

은해사 홈페이지(www.eunhae-sa.org)에 따르면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海眼寺)라고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그 뒤 여러번 중창을 거친 후 1545년(조선 인종 1년)에 천교(天敎)가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하였다. 1943년까지만 해도 이 절은 논 46만 4000여 평, 밭 2만 8000여 평, 임야 920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2,484평에 세워진 건물은 35동 245칸에 이르렀다. 이 절은 동화사(桐華寺)와 더불어 팔공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지눌(知訥)이 거조암에서 신행결사(信行結社)를 도모한 이래 주목을 받게 되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해사(銀海寺))

 

은해사 홈페이지(www.eunhae-sa.org)에 따르면 은해사에는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은해사이다. 또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고 해서 은해사라고도 한다. 신라의 진표율사는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 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일도은색세계 야해중중)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은해사는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 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이다.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은해사에는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지만,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국 불교의 강백들을 양성, 교육하는 종립 은해사 승가대학원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은해사는 조선시대 대부분의 산지 가람처럼 단탑단금당식(單塔單金堂式)으로 가람배치가 되어있다. 대웅전 앞에 있던 오층석탑은 최근 보존을 위해서 부도전으로 이전하였다. 대웅전 앞에는 보화루가 있고 보화루 좌우로 심검당과 설선당이 있으며 그 가운데 장방형의 정원이 있는 중정식 가람배치 구조이다. 중정은 장방형이지만 중간부분에 계단으로 축대를 만들어 놓아서 보화루로 들어오는 참배객이 볼 때 정방형에 가깝게 보여서 대웅전이 더 웅장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준다.

 

신라 41대 헌덕왕이 즉위한 809년에 해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이 해안사인데 이 해안사로부터 은해사의 역사가 시작된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했다. 당시 정쟁의 피바람 속에서 숨진 원혼을 달래며 왕의 참회를 돕고 나아가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서 창건한 사찰이 은해사의 시초가 되는 해안사이다. 운부암에 가는 길 부근인 해안평이 그 해안사 절터이니 운부암을 가는 길에 한번 관심있게 살펴보기 바란다. 해안사 창건후 고려시대 1270년(원종 11년)에 홍진국사가 중창하였고, 1275년 충렬왕 때 원참스님이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에도 1485년 성종 16년에 죽청스님과 의찬스님이 묘봉암을 중창하였으나, 1545년 인종 원년에 큰 화재가 발생해 사찰이 전소되었다. 이듬해 1546년 명종 원년에 나라에서 하사한 보조금으로 천교화상이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다. 이 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을 봉하고 은해사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1563년 화재로 소실되고 이듬해에 묘진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589년 선조 22년에 법영대사가 법당을 현재의 자리에 크게 중창하고 사찰의 규모를 확장하는 일대 불사를 이루어 내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산령각(山靈閣)·설선당·심검당·단서각·종루·보화루·승당·요사채·객실 등이 있으며, 그 밖에 1999년 성보박물관이 완공되었다.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던 극락구품회탱(極樂九品會幀)은 1750년에 성청(性淸)과 옥련(玉蓮)이 그린 뛰어난 작품이나 수년 전의 도난사건 이후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은해사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의 삼대 편액이 김정희의 글씨로 채워졌다. 문 위의 편액인 은해사, 불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노전의 일로향각 등 이 다섯 점의 추사 글씨는 은해사의 자랑이자 소중한 문화재이다. 지정문화재로는 중국식 건축양식을 본뜬 국보 제14호의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보물 제486호인 영천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須彌壇), 보물 제514호인 영천 은해사 운부암 금동보살좌상 등이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수와 불사를 거듭한 은해사는 한국을 빛낸 여러 고승을 배출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새 장을 여신 화쟁국사 원효스님과 해동 화엄종의 초조이신 의상스님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현재 조계종의 종조이신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 삼국유사를 저술하신 보각국사 일연스님 등이 있다. 일연스님과 원효스님의 추모 다례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홍진국사가 머무른 뒤부터 선교 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고양되었고 화엄학의 대강백이신 영파성규 스님이 이곳을 중창한 뒤로는 화엄교학의 본산으로서 그 명성이 높았다.(인용 자료 : 은해사 홈페이지 www.eunhae-s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