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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팔공산 부인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0. 10. 6. 07:54

2020년 10월 3일에 대한불교 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아홉 번째 답사지로 팔공산 동화사(桐華寺)를 둘러본 후 부인사를 찾아 갔다. 부인사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356-1 팔공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지난달에 갓바위에 가는 길에 도로 표지판에서 파계사, 부인사 표지를 보면서 파계한 스님이 부인을 얻으셨나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꼭 한번 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절이다. 대구광역시에서 발행한 팔공산 부인사 안내 책자에는 부인사를 夫人寺, 符仁寺, 夫仁寺 세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부인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신라 27대 선덕여왕의 정부표준영정을 모신 숭모전이 있고 매년 음력 3월 15일에는 숭모재를 지낸다고 한다. 숭모각 어디에도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문이 닫혀 있어서 둘러보지 못했다.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설명으로는 영정 등을 훼손시키는 범죄들이 많이 발생하면서부터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고 이런 일을 저지르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

    

대구광역시에서 발행한 부인사 안내 책자에는 선덕여왕이 부인사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선덕여왕 11년에 백제의 의자왕에게 공격을 받은 신라는 40여개의 성을 점령당하고 제일 요충지인 대야성(현 합천)마저 함락 당한다. 여왕이 친히 신라의 오악 중 중악인 팔공산에 와서 기도하니 도인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어 국난을 물리치고 통일의 대임을 이루라했다. 이에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고 한해 뒤 644년에 부인사를 창건한다. 전성기의 부인사는 39동의 부속암자에 2천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부인사는 초조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던 절인데, 1232년(고려 19년) 몽고군의 2차 침략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 일본 동경의 남선사에 인쇄본 1,215장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으로는 인쇄본을 기준으로 대장경판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에는 현재 일본 경도(京都)의 남례사(南禮寺)에 1,715판이 전해지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어서 기술 내용이 조금 다르다. 대구광역시에서 발행한 안내 책자의 내용과 달라서 추후 확인이 필요한 사항이다. 어쨌든 이 초초대장경은 우리나라의 큰 보배인데 잃어버렸다고 한다. 부인사 안내책자에 따르면, 이규보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초초대장경 상실의 아픔을 이렇게 적고 있다. 1011년부터 1078년까지 각인된 초조대장경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고려 인종 10년(1132년) 흥왕사로부터 옮겨와 부인사에 봉안하였다고 한다.(출처 : 대구광역시, 팔공산 부인사 안내책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전성기에는 39개의 부속 암자를 관장하였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승려들만의 승시장(僧市場)이 섰다는 구전이 전하여지지만, 몽고의 침입 이후 중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중창 및 중수의 역사가 전래되지 않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400m에 위치한 암자 터에다 1930년대 초에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이 중창한 것이다. 1991년 선덕묘를 선덕여왕 숭모전으로 좀 더 크게 옮겨지었고, 선덕여왕 진영을 새로 조성하였다. 당우로는 석가모니불상과 아미타불상 및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대웅전, 선덕여왕의 영정을 모신 선덕여왕 숭모전과 종각·누각, 그리고 2동의 요사채가 있다. 선덕여왕 숭모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일부 남았던 것을 1930년대 초에 중건한 것이며, 음력 3월 보름에는 이곳에서 동네 유지들과 승려가 함께 모여 선덕제(善德祭)를 지내고 있다.

   

현존하는 문화재로는 쌍탑(雙塔)을 비롯하여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석등과 당간지주·석등대석(石燈臺石)·배례석(拜禮石)·마애여래좌상 등이 있다. 최근까지 무너져 있었던 쌍탑 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된 서탑은 1966년에 복원하였으며, 신라 말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석탑 옆에는 50㎝ 가량의 머리 없는 석불이 있는데, 1978년까지는 여러 기가 있었으나 1979년에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는 2기의 석등이 있는데 1기는 가운데가 금이 갔으나 완전한 형태이고, 이보다 작은 석등은 밑받침만 남아 있다. 이 석등 앞에는 돌 사면에 높이 약 70㎝의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 배례석이 있다. 절 부근의 포도밭 속에는 신라 때의 작품인 당간지주가 있어 전성기의 절 영역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바위에 감실을 파고 조각한 마애여래좌상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마애불이다. 이밖에도 초석과 축대에 남아 있는 화려한 장대석(長臺石)이 산재해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현재의 건물은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약 400m에 위치한 암자 터에다 1930년대 초에 비구니 허상득(許相得)이 중창한 것이라고 하나, 누각인 삼광루(三光樓) 앞에는 부인사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통상 사찰들은 좌청룡과 우백호가 감싸는 곳에 자리 잡고 있으나, 부인사는 돋아 있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포근한 맛이 부족하고 주변의 숲이 없어 황량한 감마저 일으킨다. 참배객들이 어딘가 조금은 황량한 절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부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은 예전에 대웅전으로 사용하던 명부전 건물이라고 한다. 나머지 대웅전, 영산전, 삼광루, 종각 등은 근래에 복원된 것들이라고 한다. 삼광루 앞에 있는 두 기의 삼층석탑이 있다. 1964년에 복원된 서탑은 2층 기단으로 보이나 3층 기단의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일층 탑신의 길이가 통일신라시대의 탑보다 짧은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