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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팔공산 동화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0. 10. 6. 07:44

2020년 10월 3일에 대한불교 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아홉 번째 답사지로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에 다녀왔다. 동화사는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1길 1(도학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3대 종정이신 진제 법원(眞際 法遠) 대종사께서 방장(方丈)으로 계시는 팔공총림이다.

  

오전 10시에 시작하는 사시(巳時) 예불에 참석하려고 아침 일찍 출발하여 조금 속도를 내어 차를 몰았다. 대웅전에 가까운 비로암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대웅전 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체온 체크를 하고 인적사항을 적은 후 대웅전에 갔지만, 이미 스님 두 분께서 예불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예불하시는 동안에는 신도들의 법당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대구 지역이 코로나 사태로 큰 곤혹을 치른 상태이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절이라 이해는 되었지만 아쉬웠다. 같이 간 도반이 준비해 간 공양미를 전달하고 돌아서야 했다.

  

대웅전 앞에는 봉황이 깃든다는 봉서루(鳳棲樓)가 있고 봉서루 계단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대구광역시에서 발행한 동화사 둘러보기 책자에 보면 봉황 알을 상징한다고 한다. 봉화루 옆에는 범종루가 있다. 설법당 기와를 바꾸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서 구경하다가 돌아보니 천왕문에 해당하는 옹호문(擁護門)이 앞에 있었다. 알고 보니 대웅전으로 들어오는 길이 두 갈래가 있었다. 우리는 무심코 대구광역시 시내버스 급행 1번 버스를 뒤따라 들어오다 보니 주로 관광객들이 들어오는 동화사 주차장 쪽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옹호문을 지나 내려가 보니, 일주문인 봉황문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오는 길이었다. 계곡 길을 따라 올라오면서 속세의 탐진치를 털어버리고 천왕문인 옹호문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는 가람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화사 홈페이지(http://www.donghwasa.net)에 실려 있는 창건기에 따르면 동화사의 창건에는 두 가지의 주장이 있다. 첫 번째로 동화사는 493년에 극달 화상(極達和尙)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하였다. 그 뒤 832년(신라 흥덕왕 7년)에 심지 왕사(心地王師)가 중창하였는데, 그때가 겨울철인데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꽃이 만발하였으므로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두 번째로 〈삼국유사〉에는 진표(眞表) 율사에게서 영심(永深)에게 전하였던 불간자(佛簡子)를 심지(心地)가 다시 받은 뒤, 팔공산에 와서 불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이룩하니 곧 동화사 첨당 북쪽의 우물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러나 극달 화상의 창건연대인 493년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의 시기이므로 공인되기 전에 법상종의 성격을 띤 유가사라는 사명이 붙여졌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우므로, 심지의 중창을 실질적인 창건으로 보는 것이 보통의 견해이다. 창건 뒤 863년(신라 경문왕 3년) 경문왕이 비로암 3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을 조성하였으며, 934년(경순왕 7년)에는 선사 영조가 절을 중창하였다. 고려에 들어서는 1036년(고려 정조 2년) 영통사, 숭법사, 부인사 등과 함께 경∙율을 시험하는 사찰로 지정되었으며, 1190년(고려 명종 20년)에는 보조국사 지눌이 중창하였다. 1294년(충렬왕 20년)에는 국사 홍진이 절을 중건하였다. 1319년(충숙왕 6년)에는 현승이 통도사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5과를 얻어와 이를 봉안하고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1465년(세조 10년) 금당(金堂)을 중건하였으며, 1606년(선조 39년)에는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절을 중창하였고, 이어 학인이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유정은 영남도총섭으로 절에서 승군을 지휘했으며 사서원은 격문을 지어 많은 의병들을 모집, 절에서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로 일대 55개의 사찰을 거느렸던 대본산(大本山)이었으며, 현재는 대구광역시와 청도군, 칠곡군, 성주군의 사암(寺庵)을 관장하고 있다. 근래 평화통일의 발원을 담은 약사여래대불을 조성하였다.(출처 : 동화사 홈페이지http://www.donghwasa.net)

   

동화사((桐華寺)는 큰절이다. 산지 가람으로 크게 대웅전이 있는 곳, 비로암이 있는 곳, 극락전이 있는 곳, 최근에 조성한 약사여래대불이 있는 곳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사찰 내의 법당들을 묻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띤다. 약도를 가지고 갔어도 대웅전이 있는 곳에서 약사여래 대불이 있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극락전 쪽은 가보지도 못한 상태로 돌아 나왔고, 나오는 길에 봉황문 쪽으로 들어가 마애불좌상을 참배할 수 있었다.

  

봉황문에서 걸어 들어오는 길에서 홍교를 지나 왼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는 현판을 단 건물이 있고 건물 앞에 약사여래배불과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법화보궁(法華寶宮)이 있다. 홍교에서 금강계단으로 입구까지 올라오는 계단이 108 계단일 것 같아 세어 보니 정말 108계단이었다. 금강계단 현판이 걸린 건물은 전면 7칸, 측면 4칸으로 대형 건물이다. 적멸보궁 불당으로 창문을 통해 약사여래불과 진신사리가 있는 법화보궁이 보이도록 되어 있었으나, 다음 주부터 열리는 법필휘호전 준비로 진열대가 설치되어 있어서 전체를 볼 수가 없었다. 스님 한 분이 예불을 드리고 있어서 예불까지만 참여하고 내려왔다. 약사여래대불 앞에 마련되어 있는 기도처에 앉아 신묘장구대다리니경 21독과 함께 천수경을 일독하고 법화보궁을 둘러보았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직접 친견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석조 약사여래대불(藥師如來大佛)은 좌대 높이만도 13m이고, 전체 높이가 33m나 된다고 한다. 전북 익산시 황등의 황등석으로 조성하였으며, 불상 원석은 2천 톤이고 좌대가 3천 톤이라고 한다. 동화사 홈페이지(http://www.donghwasa.net)에 따르면, 약사여래대불은 칠천만 겨레의 숙원인 남북통일과 세계평화, 인류의 행복을 간절히 염원하며 조성한 팔공총림 동화사의 대표 불상이다. 전체 높이가 33m에 이르러 석조 불상으로는 세계 최대의 규모이다. 1990년 10월 26일 착공하여 1992년 11월 27일 점안대법회를 봉행하였다. 약사여래대불 앞에는 국내최대의 삼층석탑(높이 17m, 원석 2천 톤) 2기, 석등(높이 7.6m) 2기가 있고, 뒤로는 호법신장과 금강역사가 병풍처럼 조성되어 있다. 앞에는 통일기원대전이 조성되어 있는데,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통유리를 통해 약사여래대불을 바라보게 되어 있다. 약사여래대불 지하에는 불교문화관(국제관광선체험관)이 조성되어 있다.

   

대웅전으로 돌아와 천수경을 일독을 하려 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참배만 하고 나가야 한다고 해서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웅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면에서 보면 앞문이 넓게 보여 위엄이 있다. 1727년(영조 3년)부터 1732년(영조 8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전하고 있다고 한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부처님, 아미타부처님, 약사여래부처님께서 모셔져 있는데, 건물의 규모에 비해 작은 불상으로 모셔져 있다, 그동안 커다란 불상 위주로 보아오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직지사 대웅전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법당의 크기에 비해 삼존불상의 크기가 작고 아담하여 더욱 위엄이 있어 보인다. 추풍령 아래 지역의 절들의 공통점인지를 유심히 봐야겠다.

   

동화사 홈페이지(http://www.donghwasa.net)에 따르면, 대웅전은 보물 1563호로 동화사를 대표하는 당우(堂宇)이다.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가공하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활용하여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 전각이다. 임진왜란 후 1606년 사명대사가 학인(學仁)에게 명하여 중창하게 하고, 1677년 개창하였다. 이후 1725년 을사년의 큰 불로 인해 1727년 천순(天順), 낙빈당 홍제(落賓堂 弘濟), 홍우(弘雨), 의심(義心) 등이 화주가 되어 중수하였다.

   

대웅전의 문짝은 어칸과 협칸 모두 빗솟을살에 활짝 핀 연꽃과 국화꽃, 금강저를 새겨놓았다. 심지왕사가 절을 지었을 때 겨울임에도 하늘에서 오동꽃이 흩날렸다는 창건 설화는 이 꽃살문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대웅전 안에 모셔진 삼존불상은 1728년 왕준이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 안에는 여러 점의 불화가 걸려 있는데, 삼존상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1620년에 조성되었고, 삼장탱화와 지장탱화는 대웅전이 건립된 무렵인 1728년에 제작되었다.(출처 : 동화사 홈페이지http://www.donghwasa.net)

  

대웅전에서 나와 주차장 아래에 있는 비로암을 둘러보았다. 비로암은 별도로 포스팅하였다. 팔공산로로 나가서 옛길의 일주문인 봉황문을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마애불좌상을 둘러보았다. 봉황문 바로 앞에 있는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높이 106m의 작은 불상으로 보물 제243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동화사 홈페이지(http://www.donghwasa.net)에 따르면,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은 지면에서 높이 조성되어 있으며 연화 대좌 아래로 구름무늬가 생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한 모습을 연출하며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풍만하게 살이 오른 얼굴과 미소를 머금은 입가의 표정에서 깨달은 자의 자비로움이 엿보인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으며 다리는 반가부좌한 자세로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자연스레 내려놓았다. 두 어깨를 덮은 법의(法衣)는 세밀하면서 유연하고 오른쪽 어깨에 달린 가사의 끈 장식과 아래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그림을 보듯 생동감이 있다. 배 모양의 광배(舟形光背) 안에는 두 줄의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따로 표현하였고,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불상의 머리 주위를 깊게 파내어 양각의 효과를 효율적으로 드러냈으며, 대좌로 내려갈수록 얇은 선각을 함으로써 구름의 신비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다.(출처 : 동화사 홈페이지http://www.donghwasa.net)

   

동화사 홈페이지(http://www.donghwasa.net)에 따르면 총림(叢林)은 선(禪)•교(敎)•율(律)을 겸비하고 학덕과 수행이 높은 본분종사인 방장(方丈)의 지도하에 스님들이 모여 수행하는 종합적인 수행도량이다. 총림(叢林)이 되기 위해서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기관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염불 전문교육기관인 염불원(念佛院) 등을 모두 갖춰야 한다. 그러나 염불원을 별도로 갖춘 사찰이 거의 없다 보니 일반적으로 총림이라고 하면 “선원, 강원, 율원을 두루 갖추고 있는 사찰”이란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총림은 일반 사찰과 달리 총무원으로부터 상당한 자율권을 보장받아 사찰을 운영한다.

   

1,5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불교의 대표 총림으로서, 조계종 종정예하이신 진제 법원 대종사께서 주석하시며 선원, 율원, 강원에 100여 명의 대중이 상주하며 여법히 정진하는 청정 수행도량이다. 세계 최대의 석불인 약사여래대불을 비롯한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동화사는 동아시아 10대 관광명소로 지정되어 연중 내내 수백만 명의 내외국인들이 참배하는 동양의 대표 성지이다. 또한, 국내 유일의 선(禪) 체험관인 불교문화관에는 오색영롱한 부처님 진신사리 7과가 모셔져 있으며, 법화경 7만자를 석각과 판각의 황금경판으로 조성하는 대작불사가 진행이다. 약사여래대불 24시간 개방으로 365일 꺼지지 않는 수행기도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는 동화사는 대구시민들의 정신적인 쉼터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출처 : 동화사 홈페이지http://www.donghwasa.net)

   

코로나19 때문에 법당에서 기도를 할 수 없어 동행한 도반은 기분이 많이 상했나 보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불가피한 일이고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동화사 답사를 마쳐야 했다. 창건 설화에 오동나무가 등장하면서 사찰 내에서 오동나무가 많았다. 심지대사 나무처럼 200년 된 오동나무도 있다. 또한, 오동나무에만 앉고 대나무 잎만 먹었다는 봉황 그림과 봉황 조각품들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건물의 대들보에도 봉황들이 앉아 있고 비석의 받침대도 봉황 형상이다. 코로나19사태로 인해 공양간은 문이 굳게 닫혀 있고, 사찰음식체험관이 있어서 식사를 할 수 있나 전화해보니, 그곳은 예약을 통해 직접 음식을 만드는 체험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극락전 경내를 둘러보지 못하고 나온 것이 못내 아쉽지만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부인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