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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백암산 백양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1. 12. 12. 17:36

2021년 12월 4일(토)에 대한불교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18번째 답사지로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북하면 약수리 26)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白羊寺)에 다녀왔다. 백양사는 노령산맥 끝자락에 호남평야를 마주하고 솟아 오른 백암산(741m) 백학봉 밑에 위치하고 있다. 산위의 암석이 모두 흰색인 백암산(白巖山)은 전라북도 순창군, 정읍시와 전라남도 장성군에 걸쳐 있으며, 내장산(內藏山) 줄기에 있는 산이다. 내장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으며 예부터 봄이면 백암, 가을이면 내장이라 했다.

 

고은 선생의 『절을 찾아서』에 보면 한 선사가 산내암자에 머무를 때 백학봉에서 흰 양 한 마리가 그 선사의 경전 소리를 듣고 간 뒤로 양의 무리가 자주 왕래했다는 전설에 의해 백암산 백암사를 백양산 백양사로 고쳤다고 한다. 그 때문에 백양사의 역대 조사를 조사라고 하지 않고 일명 환양(喚羊)이라고 한다. 양을 부르는 경지의 조사 도력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이 백양사의 높은 사격(寺格)을 말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부를 喚, 양羊의 환양(喚羊)은 글자 그대로 양을 부른다는 뜻이다.

 

마침 가는 날이 음력 11월 초하루라 사시예불을 마친 후 초하루 법회에도 참석 할 수 있었다. 사시예불로 보례 진언 독송부터 천수경, 칠정례, 축원까지 마친 후 이어서 신중단을 향해 예불을 올리고 화엄성중 정근까지 진행하고 반야심경 독송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신중단을 향해 화엄성중 정근까지 진행하는 예불에는 처음 참석한 셈이다. 사시예불을 마친 후 초하루 법회를 열고 주지 스님의 법문까지 듣는 영광을 얻었다. 주지스님께서는 법문에서 최근 국회에서 정청래 의원이 문화재 관람료 징수 문제를 문제 삼은 것에 대해 배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국립공원을 지정할 때 많은 사찰 소유의 산림이 편입되었고 아직도 국립공원의 대부분의 산림이 사찰 소유지라고 한다. 국립공원 입장료를 징수할 때 문화재 관람료를 함께 징수하여 사찰에 전하기로 협약하여 진행해 오다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문화재 관람료만 따로 징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문화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불교 문화재를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을 듣고 이해를 하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백양사 소개글에 따르면, 632년(백제 무왕 33년)에 여환(如幻)이 창건하여 백양사라고 하였으며, 1034년(덕종 3) 중연(中延)이 중창하면서 정토사(淨土寺)라 개칭하였고, 1350년(충정왕 2) 각진국사(覺眞國師)가 3창하였다. 15세기에 백암사(白巖寺)로 바뀌었다가 16∼19세기 중반에 다시 정토사로 고쳤다. 다시 백양사로 개액(改額)한 것은 1574년(선조 7) 환양(喚羊)이 중건하면서부터이다.

 

백양사는 일제강점기 31본산 중 하나였으며, 현재 부속 말사 26개 소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보전, 명부전, 칠성각, 진영각(眞影閣), 천왕문, 선실(禪室), 요사채와 범종·법고·목어·운판 등의 사물(四物)을 소장하고 있는 범종각이 있다.

 

이 가운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인 백양사 대웅전은 1917년 송만암이 백양사를 중건할 때 건립한 것으로 내부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979년 보각행(普覺行)이 조성하여 새로 모신 10척 높이의 불상, 그 왼편에 용두관음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또한 대웅전 내 오른쪽으로 바늘귀를 꿰는 모습, 등을 긁는 모습 등 해학적인 모습을 한 나한상 23체가 봉안되어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인 백양사 극락보전은 400여 년 전에 지은 것으로서 백양사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영·정조 대에 지은 건물인데, 건평 50㎡에 세워진 정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1973년 단청하였으며 1976년 보수하였다. 명부전은 1896년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각 주두(柱頭)마다 공포가 장식되어 있다. 전내에는 흙으로 조성한 시왕(十王)과 목조 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명부전은 수리중이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백양사 사천왕문은 백양사의 정문으로 1917년 건립되었으며, 현재 문의 오른쪽에는 지국천왕과 증장천왕, 왼쪽에는 광목천왕과 다문천왕이 봉안되어 있다. 이 밖에도 대웅전 뒤편의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 팔층탑(八層塔)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 3과가 안치되어 있으며, 부도전에는 백양사에서 배출, 주석하였던 휴정(休靜)·유정(惟政)·모운(慕雲)·태능(太能)·범해(梵海) 등 18승려의 사리와 유골을 모신 석종(石鐘) 모양의 탑과 비(碑)가 있다.

 

백양사의 산내암자로는 약사암(藥師庵)과 영천굴(靈泉窟), 1351년에 창건한 청류암(淸流庵), 1981년에 지은 수도도량 물외암(物外庵), 천진암(天眞庵) 등이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있어 온 운문암(雲門庵) 등 많은 암자들이 6·25전쟁 때 불타버렸다. 이 중 운문암은 6·25전쟁 전까지만 해도 백양사 8개 암자 중 대표암자였으며, 백양사 뒤 계곡을 끼고 3.5㎞ 위에 있다. 고려 때 각진이 창건했다는 운문암은 백양사 수도도량 중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있으며, 조선시대의 신승 진묵(震默)의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진묵이 임진왜란 직전 이 암자에서 차를 달이는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체 대중이 차를 달이는 운문암 중을 조사(祖師)로 모시라는 현몽을 한 뒤 진묵을 조실(祖室)로 앉혔다. 어느날 진묵은 “내가 올 때까지는 이 불상을 도금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지금도 그 불상은 거뭇한 그늘색을 띤 채 진묵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중략)

 

절 일대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고 약 3만 그루가 밀집하고 있어 춘백양(春白羊) 추내장(秋內藏)이란 칭호를 얻고 있다. 이 밖에도 백암산의 학봉·상왕봉·사자봉·가인봉 등의 절경과 설경 등이 어울려 백양사 일대는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백양사(白羊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