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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지리산 화엄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1. 12. 12. 17:44

2021년 12월 5일(일)에 대한불교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19번째 답사지로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마산면 황전리 산20-1)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에 다녀왔다. 화엄사는 전남 구례읍에서 동쪽으로 5.4km 떨어진 곳,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천년 고찰로 544년(백제 성왕 22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하여 절의 이름을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지난 2020년 5월 10일에 다녀온 후 일년 반만에 다시 찾았다.(참조 :https://blog.daum.net/agindoll/5863258)

 

화엄사는 쌍계사, 천은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의 하나이다. 화엄사는 싸리나무 기둥으로 유명한 각황전(覺皇殿)으로도 유명하다. 고은 선생의 『절을 찾아서』에서 각황전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선다. 이 불당을 한번 보면 그것을 잊을 수 없어서 각전(覺殿)이라고 할 수 있다. 여수의 진남관, 충무의 세병관과 함께 한국 최대의 목조 건물이다. 건물 자체가 국보로 지정될 만큼 우아하고 당당한 바는 어떤 법당도 따르지 못한다. 한 개의 기둥이 요즈음 건물 5층 높이를 떠받들고 있으며, 그 기둥을 이은 자국이 없으니 얼마나 높은 기둥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출처 : 고은(1987), 『절을 찾아서』).

 

화엄사 창건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1978년에 신라 경덕왕대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여 연기는 황룡사(皇龍寺)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 13년) 8월부터 화엄경 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던 실존 인물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창건 연대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신라 제24대 왕) 때가 아닌 경덕왕(재위 742~765: 신라 제35대 왕) 때이고, 아울러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다만, 8세기보다 앞선 어느 시기부터 이 터에 가람이 있었고 그것이 연기조사 대에 이르러 대가람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화엄사 소개글에 따르면,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창사의 이념인 화엄사상의 구현이 이루어져 왔다. 창건주인 연기조사를 비롯하여 정행(正行)·낭원(朗圓)·현준(賢俊)·결언(決言)·관혜(觀惠) 등의 화엄학승(華嚴學僧)들이 머물렀다.

 

화엄사의 현존 건물은 각성이 중건한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지리산 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문수(文殊)·보현(普賢)의 동자상(童子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제3문인 천왕문(天王門)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 사천왕상(木刻四天王像)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濟樓)가 종루(鐘樓)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다. 동서 쌍탑(雙塔)의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으며, 이 밖에도 영산전(靈山殿)·나한전(羅漢殿)·원통전(圓通殿)·명부전(冥府殿)과 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및 요사(寮舍)인 원융료(元戎寮)·청풍당(淸風堂)·만월전(滿月殿) 등이 있다. 1977년 각황전 해체보수를 완료했으며, 1984년부터 만월당·일주문을 세웠다. 1989년 원융료·청풍당을 짓고, 연기암을 복원했다.

 

이 중 보물 제299호인 구례 화엄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三身)의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보물 제1363호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華嚴寺 大雄殿 三身佛幀)이 있다. 또한, 국보 제67호인 구례 화엄사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나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제루(普濟樓)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石燈)과 사사자 삼층석탑(四獅子 三層石塔)·노주(露柱)·동서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석경 등의 중요한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의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높이 6.36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은 8각의 하대석(下臺石)이 병(甁) 모양의 간석(竿石)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臺上)에는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이고 서 있는 승상(僧像)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사사자석탑은 창건주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孝臺)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각황전 왼쪽 옆으로 적멸보궁 안내판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적멸보궁 전각을 수리 완료한 후 이 석탑과 석등을 참배하도록 조성되어 있었다.-Agindoll 추가함). 원통전 앞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方形)의 석단(石壇)을 받치고 있는데, 이를 흔히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300호)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는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양탑이 있다. 보물 제132호인 구례 화엄사 동 오층석탑은 보물 제133호인 구례 화엄사 서 오층석탑에 비하여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되어 있다. 서탑은 1995년에 해체하여 보수되었는데, 이때 진신사리와 더불어 4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필사본 다라니경과 불상을 찍어내는 청동불상주조틀 등이 있었다.

 

장륙전의 사방 벽은 화엄석경(華嚴石經)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물 제1040호인 이 구례 화엄사 화엄석경은 의상이 조성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화엄사가 세워진 경덕왕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많은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方塼: 네모난 벽돌) 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위에 있다. 글자체는 쌍계사 진감국사비(雙磎寺 眞鑑國師碑)를 닮았다.(일부 화엄석경을 화엄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