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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강진 다산초당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3. 3. 14. 22:06

2023년 3월 12일에 대전 한밭문화원에서 주관하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전남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길 68-35(도암면 만덕리 산 103-3)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다녀왔다. 백련사를 답사하고 산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넘어왔다. 다산초당은 차나무가 많은 이곳 다산(茶山)에 있는 초가집이기도 하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묵었던 초가집이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된다. 지금은 초가집이 아니고 기와가 올려져 있다. 

 

다산초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801년(순조 1년)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 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1여 년간 생활한 곳이다. 이곳에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정석(丁石), 약천(藥泉),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다조(茶竈)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은 1801년 겨울에 강진에 도착하여 동문 밖 주막집에서 우거하였고, 1805년 겨울에는 보은산방에서 기식하였으며, 1806년 가을에는 제자 이학래의 집에 이사가 있다가 1808년 봄에야 다산에서 살았다고 한다. 다산은 이곳 다산초당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넘어오는 길에는 야생 차나무들이 흐드러지게 자라고 있었다. 말 그대로 다산(茶山)이다. 최근에는 군에서 식재한 황칠나무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이 길은 코리아 루트 중 남파랑길 83코스이다. 고개를 넘어오면 천일각(天一閣)을 만난다. 다산 선생이 계실 때는 없었던 정자이지만 다산께서도 이 장소에서 멀리 구강포를 바라보시며 시름을 놓으셨으리라.

 

천일각에서 구강포를 바라보고 내려오면 동암(東庵)을 만난다. 조금 내려오면 다산초당이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초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원래 만든 초당은 초가였으며 초당(草堂)이라는 이름도 풀로 만든 집 즉 초가를 뜻한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초당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사각형의 자그마한 연못이 있고, 연못 안에는 우리나라 전통 연못 형태대로 작은 섬(?)이 있다. 앞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쪽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당시 다산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초당 서쪽에는 다산의 제자들이 학문 수행을 했던 서암(西庵)이 있으며 동쪽에는 다산이 학문을 수양했다는 동암(東庵)이 있다.

 

1800년 다산을 아끼고 사랑했던 임금인 조선 정조가 승하하고 그의 아들인 23대 조선 순조가 즉위하였을 때인 1801년(순조 1년)에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辛酉邪獄)이 일어난다. 신유사옥은 1801년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친정이 소속된 노론 벽파를 후원하면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천주교에 관여했던 남인 인사와 교회를 이끌고 있던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어 많은 인사가 옥사하거나 처형당했다. 신자 약 100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같은 해 12월에 척사윤음이 공표되면서 일단 마무리되었으나 이후에도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었다.

 

충남 서산에서 출생한 정순왕후는 15세 처녀로 66세의 영조 임금에게 시집간 영조의 계비다. 순조가 즉위한 후 46년 동안 국모의 지위에 있으면서 정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녀는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에도 간접적으로 개입했고, 손자뻘인 정조의 권력에 끊임없이 도전했다. 순조 대에는 대왕대비의 권한으로 3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면서 총 480회의 하교를 통해 정조가 구축한 탕평정치의 기반을 모조리 파괴하고,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통해 정조를 보위했던 남인 세력을 소탕했다.

 

다산초당을 구경하고 내려오는 길에서 제법 크게 조성된 묘를 만난다. 다산의 제자인 윤종진의 묘이다. 윤종진의 조부인 윤단은 다산 선생의 외가쪽 친척이 되는 분으로 다산 선생이 강진 읍내와 절집에서 떠돌다가 이 다산으로 오게 되는 계기를 만든 분이라고 한다. 미술사학을 전공하신 유홍준 교수는 묘 양쪽에 세워져 있는 작은 석상에 관심이 많으셨다. 나는 상석 앞에 놓여 있는 향안석(香案石)에 새겨진 태극 문양과 만(卍)자 문양 등이 신기했다. 유교의 상징과 불교의 상징이 공존하고 있다. 석상을 카메라에 담아 오지 못한 것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