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여주 신륵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4. 8. 16. 17:13

2024년 8월 11일(일)에 대전 한밭문화원에서 주관하는 2024년 8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두 번째 답사지로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천송동 282)에 있는 신륵사(神勒寺)에 다녀왔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륵사 홈페이지(http://www.silleuksa.org/ )에 따르면 어느날 원효 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원효 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 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은 정확한 문헌 사료가 없어서, 문헌상으로는 창건의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안내하고 있다.

 

일주문 앞에서 경기도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탐방을 시작하였다. 일주문 현판은 봉미산 신륵사(鳳尾山 神勒寺)로 적혀 있다. 이곳은 봉황의 꼬리가 남한강 물에 걸쳐 있는 형국이라 봉미산 신륵사로 불린다. 오른쪽으로 남한강을 바라보면서 불이문(不二門)에 도착하였다. 이곳 남한강을 여주에서는 여강이라 부른다고 한다.

 

신륵사는 신력을 뜻하는 신(神)과 굴레, 재갈, 제압한다는 뜻의 륵(勒)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이곳 여강은 물살이 세고 홍수가 나면 많은 피해를 입었던 곳이라, 물을 말로 비유하여 사나운 말을 굴레로 다스렸다는 데서 유래한 절 이름이다.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가 있고,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나타난 용마를 인당대사(印塘大師)가 고삐를 잡아 순하게 했다는 설화가 있다고 한다. 어쨌든 홍수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배경에서 나온 설화인 듯하다.

 

불이문에는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아금강역사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흠금강역사가 그려져 있다. 폭염의 날씨라 우선 시원한 강가의 강월헌(江月軒) 정자로 가서 신륵사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바로 옆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신륵사의 상징인 벽돌로 만든 다층전탑(多層塼塔)이 있다.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나옹선사의 다비식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다층전탑은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의 전탑이라고 한다.

 

경내로 들어가는 누각은 구룡루(九龍樓)이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자리를 뜻하는 듯하다. 누각 옆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이고 뒤로는 금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이 있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극락보전 앞 마당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신도를 맞이하고 있다. 극락보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신검당이 있고 왼쪽에는 적묵당이 있다. 극락보전 뒤쪽으로는 조사당, 명부전, 관음전이 있고, 오른쪽 뒤로는 삼성각이 있다. 명부전 옆에는 재를 모신 후 영가들을 전송하는 봉송각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은행나무에는 벼락을 맞은 줄기가 마치 관세음보살처럼 보여서 신기했다. 이 은행나무는 660여년 전에 나옹선사께서 심으신 것이라고 한다. 이곳 은행나무는 숫나무이다. 은행 꽃이 필 때 오면 많은 수꽃을 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많은 은행 열매를 맺는 것과 대조적이다. 숫나무라 예전에는 절 살림에 보탬이 안되었을 텐데도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기야 요즘은 은행나무 숫나무가 더 인기가 좋은 세상이 되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조사당에는 나옹선사의 스승인 지공(指空)화상와 나옹화상, 나옹화상의 제자인 무학대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조사당은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인데도 대들보가 없는 전면 1칸, 측면 1칸의 특이한 건축물이다. 조사당 뒤편의 언덕 위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부도인 석종과 석종비가 있다. 풍수지리학에 능했던 나옹선사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잡은 명당 자리라고 한다. 석종은 통도사 금강계단과 유사하게 넓은 기단의 전면과 측면에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석종비에는 목은 이색 선생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고, 당대의 권력자들인 염제신, 이인임, 최영, 이득분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신륵사가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하였기 때문이다. 나옹이 입적할 때 오색 구름이 산마루를 덮고, 구름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으며, 수많은 사리가 나왔고, 용이 호상(護喪)을 했던 일들이 그것이다. 3개월 뒤인 1376년(우왕 2년) 8월 15일에 절의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頂骨舍利)를 봉안한 부도를 세우는 한편 대대적인 중창이 함께 이루어졌다.

 

1469년(예종 1년) 경기도 광주의 대모산(大母山)에 있던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 여주로 이장된 후부터 왕실에서 신륵사를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것을 결정하였고, 1472년(성종 3년) 2월에 대규모 중창 불사가 시작되어 8개월 만에 200여 칸의 건물을 보수 또는 신축하였다. 그 이듬해 대왕대비는 신륵사를 보은사(報恩寺)라고 개칭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사대부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전락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병화로 폐허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년)에는 계헌(戒軒)이 중건하였고, 1700년(숙종 26년)에는 위학(偉學)과 그의 제자 우안(宇眼)과 천심(天心) 등이 삼존상을 중수했으며, 이어서 1702년에도 중수하였다. 1726년(영조 2)에는 영순(英淳) 등이 동대에 있는 전탑을 중수했는데, 당시에 세웠던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하여 조사당·명부전·심검당·적묵당·봉향각·칠성각·종각·구룡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1797년(정조 21)에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보물로 지정된 여주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驪州 神勒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을 봉안하였고, 1900년에 그린 후불탱화, 신중탱화, 감로탱화와 1908년에 조성한 지장탱화가 있으며, 1773년(영조 49)에 주조한 범종(梵鐘)이 있다. 그리고 극락보전 정문 위에는 ‘千秋萬歲(천추만세)’라고 쓴 현판이 있는데, 나옹의 친필이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 현판은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글씨가 달라 보이는 특이함이 있다.

 

절의 동쪽 강변 바위 위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경내의 서쪽 언덕에는 부도 2기가 있다. 삼층석탑은 나옹을 화장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탑이 있다. 나옹의 화장지에 세워진 삼층석탑 옆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6각의 정자가 있다. 그 전에 지어진 것은 1972년의 홍수로 떠내려가고, 그 뒤 삼층석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다. 누각의 이름인 강월헌은 나옹의 당호인데, 그를 추념하여 이곳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인용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륵사).

 

▲아금강역사
▲ 흠금강역사
▲ 여강(남한강) 변의 정자
▲ 여강의 황포돛대
▲강월헌(江月軒)
▲구룡루
▲ 극락보전 -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
▲ 극락보전에 모신 아미타여래 삼존상
▲ 적묵당
▲심검당
▲극락보전 앞에서 바라본 구룡루
▲조사당 앞의 보호수 향나무
▲ 조사당 - 대들보가 없는 정면 1칸, 측면 1칸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
▲ 조사당에 모셔진 삼화상(지공 화상, 나옹 화상, 무학대사) 진영
▲ 나옹선사 부도로 올라가는 길
▲보제존자 나옹선사 부도인 석종
▲보제존자 나옹선사 석종비
▲ 굴뚝
▲대장각기비
▲ 명부전
▲ 명부전 뜰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관음전
▲범종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