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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생가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4. 8. 17. 10:45

2024년 8월 11일(일)에 대전 한밭문화원에서 주관하는 2024년 8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네 번째 답사지로 경기 여주시 명성로 71(능현동 250-3)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에 다녀왔다. 조선 26대 고종 황제의 황후 명성황후(明成皇后)께서 출생하여 8세까지 살았던 집이다. 명성황후 생가가 이곳 여주에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조선에는 제18대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 김씨가 있고, 제26대 고종의 황후인 명성황후 민씨가 있다.

 

명성황후(1851∼1895)는 1851년(철종 2)에 이곳 생가에서 민치록(閔致祿)과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 한산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8세 때 부친이 타계한 뒤, 어머니와 함께 서울 안국동의 감고당(感古堂)으로 올라가 살았다.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친정집이었다. 16세이던 1866년에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고 대한제국이 되면서 황후가 되셨다.

 

명성황후는 여흥민씨(驪興閔氏) 가문에서 배출한 세 번째의 조선 왕비이다. 장희빈과 얽혀있어서 드라마 등에 가장 많이 출현하였던 숙종의 두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와 같은 집안 출신이다. 명성황후는 제27대 순종 황제의 생모로 4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고, 순종만이 대한제국의 두 번째 황제를 지냈다.

 

명성황후는 조선말기에 혼란스러운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분이며, 1895년에 일본의 공권력 집단의 야만적 만행으로 경복궁에서 살해당하셨다. 사후에 일본 측은 왜곡과 음모로 부패의 화신으로서 조선을 망친 ‘궁중의 암탉’이며, 이 사건을 흥선대원군과 조선군 훈련대의 범죄로 덮어씌웠다. 근래에는 명성황후를 친견하였던 서양인들의 자료가 발견되면서 고종의 정치적 내조자였으며 조선의 국모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명성황후 자료에 따르면, 명성황후를 직접 대면했던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의 부인 혹은 비숍 같은 영국인 여행가의 기록은 일본 측과 달리 명성황후에 대한 긍정적 서술이 적지 않다. 명성황후는 궁중 여성으로서는 동양의 고전에 밝았고, 서양의 종교와 풍속, 정치와 의회제도, 여성의 교육과 지위 등에 관심이 지대하였다. 한편 지적이고 개화된 궁중 여성이기도 했다. 명성황후는 유가적 소양과 서양의 문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과 왕실, 군주와 국가의 활로를 추구하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국모’이자 근대형의 여성 정치가로서 재평가되고 있기도 하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성황후 기념관에서 문화관광해설사가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에 얽힌 우리나라 근대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주차장에 내리면 멋진 정원이 꾸며져 있고, 일제의 칼에 시해를 당하신 명성황후를 추모하는 명성황후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기념관 정문을 들어서면 도자기로 구워 만든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다. 아직까지 명성황후의 진영이 남아 있지 않아 명성황후를 직접 알현했던 국내외 인사들의 말을 종합하여 그린 초상화라고 한다.

 

명성황후 생가 옆에 있는 민유중 신도비 옆에서 명성황후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생가 바로 뒷산에 묘가 있는 민유중(閔維重, 1639~1687)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이고, 제19대 숙종의 장인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민유중은 우리 고장의 동춘당 송준길의 딸과 혼인하여 인현왕후를 낳은 분이고, 우암 송시열 등과 함께 노론의 핵심 인물이었다.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이며 인조의 생모로 기사환국 때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에 왕비로 복위되신 분이다. 신도비가 무척 크다. 그 당시 여흥민씨 집안의 위세를 느낄 수 있다. 신도비 옆에는 명성황후 탄강구리라는 비각이 있다.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방이 있던 자리에 탄생을 기념하는 明成皇后 誕降舊里(명성황후 탄강구리) 즉,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이라고 새겨진 비와 비각이 있다.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후기인 1687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본래는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는 묘막(墓幕)으로 사용되었던 집이다. 직계 후손 민치록이 묘를 관리하면서 이 집에서 살면서 명성황후를 낳았다. 전면에서 보면 긴 일자형 행랑채가 있고 그 뒤로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이 집은 조선 후기 일반적인 양반 가옥의 배치와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안채의 몸채와 날개채에 각각 큰 저장 공간을 마련한 것에서 애초의 용도인 묘막의 특징을 볼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1996년에 안채가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여주시가 안국동에서 폐철될 위기에 있던 감고당(感古堂)을 옮겨와 설치해 놓은 곳도 볼 수 있다. 원래 감고당은 서울 안국동에 있는 현재의 덕성여고 터에 있었다. 인현왕후가 친정을 위해 지어준 건물로 민유중이 살던 집이다.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고 6·25 한국전쟁 때 다시 파괴되었으나,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5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 등이 복원되었다. 2006년에 이곳 여주로 이전 중건되었다. 버스 출발 시간이 촉박하여 주마간산격으로 둘러보고 나왔다.

 

▲ 명성황후 기념관에 있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근영
▲ 명성황후 생가
▲ 수리중인 별당
▲ 생가 뜰에 피어 있는 상사화 - 화려한 꽃무릇에 자주 이름을 빼앗기고 있는 상사화
▲ 明成皇后 誕降舊里(명성황후탄강구리) 비가 있는 비각
▲민유중 신도비
▲ 민유중과 은진 송씨 묘로 올라가는 길
▲ 갑고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