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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해남 우수영 관광지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4. 9. 15. 17:23

2024년 9월 8일에 대전 한밭문화원 2024년 9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전남 해남군 문내면 관광레저로 12 일원에 있는 해남 우수영 관광지를 다녀왔다. 답사를 다녀온 후 회사일이 밀려 이제서야 첫번째 답사지인 우수영 관광단지에 대한 답사기를 올린다. 해남 우수영 관광지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께서 일본 수군과 싸워 대승을 거둔 명량대첩이 펼쳐진 울돌목에 있다. 전남 해남군과 진도군을 잇는 진도대교를 배경으로 전라 우수영이 있던 해남군 쪽에 명량대첩공원,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 울돌목 스카이워크, 명량 해상 케이블카 등이 있고, 울돌목의 조수의 흐름과 함께 고뇌하는 이순신상, 명량대첩탑, 이색대첩비, 울돌목 판옥선 등을 볼 수 있다.
 
주차장에 도착한 후 문화관광해설사의 울돌목과 우수영에 관한 설명을 듣고, 안내를 받으며 울돌목을 둘러보았다. 이곳 울돌목은 바다가 운다고 하여 명량(鳴梁, 울 鳴 대들보 梁)이라 한다.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 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00미터,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미터, 유속이 시속 24km에 달한다고 한다. 빠른 물살이 암초에 부딪히며 소용돌이 치는 소리가 10리 밖에서까지 들린다고 해서 울돌목, 명량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명량대첩의 전적지이기도 하지만, 전라 우수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이다. 남쪽을 바라보고 계신 한양의 임금님 입장에서 전라도의 우측에 있는 이곳이 전라 우수영이고, 전라 좌수영은 여수에 위치해 있다. 명량대첩공원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이순신 장군이 승리한 명량대첩을 기념하고 옛 성지의 모습을 간직하고자 1986년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받고, 1990년에 울돌목을 바라보는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울돌목 해변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을 표현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갑옷 차림도 아니고 칼 대신 지도를 들고 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정유재란이 시작될 때쯤 일본군의 심리전과 원균 등의 모함에 의해 면직된 후 권율장군 밑에서 백의종군 하시던 이순신 장군이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을 숱한 좌절과 고뇌, 목숨을 건 수 많은 전투 등을 표현한 동상이라고 한다.
 
공원내에 있는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은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건설된 기념전시관으로 건물 외형은 판옥선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3층으로 올라가 세계 7대 해전사를 둘러보고 1층으로 내려오면서 판옥선 등을 공부할 수 있도록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전시관 입구에는 트릭아트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어서 멋진 사진들을 찍을 수 있다. 진도대교 밑으로 가면 영화 명량 촬영지라는 현판이 있는 정자와 판옥선을 구경할 수 있고, 울돌목 스카이워크를 걸으며 빠른게 흐르는 울돌목 조수를 직접 볼 수 있다.
 
울돌목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라를 지킨 명량대첩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조선 선조 30년) 음력 9월 16일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전선(戰船)인 판옥선 13척과 지원선인 초탐선 32척의 배로 일본의 전선인 세키부네 133척과 후방 지원선 200척과 싸워 대승을 거둔 해전이다. 조선 수군이 13척의 판옥선으로 10배가 넘는 133척이 동원된 일본 수군을 궤멸시킨 대첩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모든 전투 중에서 조선의 존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격전으로서 단 한번의 승전으로 조선의 패망을 막아내고 일본의 작전을 꼬이게 한 해전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년(壬辰年) 음력 4월 13일에 시작된 임진왜란을 끝내기 위한 명나라와 일본의 정전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선조 30년) 정유년(丁酉年) 1월에 재차 조선을 침공하였다. 일본은 한반도 내륙이 산악 지형임을 고려하여 해상을 장악하여 수로를 통해 병력을 수송하고 육군에게 물자를 보급한다는 계획이었다. 이곳이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진다는 말은 일본의 전략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심리전으로 모함을 받아 모든 관직에서 면직된 후 권율 장군 밑에서 백의종군하고 있을 때이다. 1597년 음력 7월 15일에 경상남도 거제도와 칠천량 사이 해협에서 벌어진 칠천량 전투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은 대패하여 판옥선 100여척을 잃었다. 이 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자신의 지휘하에 있던 판옥선 10척을(일부 자료에는 12척) 이끌고 전선에서 후퇴하여 회룡포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인계하게 된다. 이후 겨우 12척의 판옥선으로 수군 진영을 정비한 이순신 장군은 장계에서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전선이 있사오니(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이후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장흥에서 수리한 1척의 판옥선을 포함하여  13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궤멸시키게 된다.
 
나무위키 명량해전( 명량 해전 - 나무위키 (namu.wiki )이 전하는 상황을 인용하면, 칠천량 패전이 보고된 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문제로 떠들썩했지만 결국 유일한 적임자는 이순신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이 언급되자 불쾌하게 여기며 대답 없이 그 자리를 나가버렸고, 결국 남아 있던 대신들이 복직을 결정했다. 나라가 절단날 상황에서도 선조는 이순신을 경계하고 싫어하며 질투하기를 끝내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울돌목의 진도대교 밑에는 조선의 전선인 판옥선이 전시되어 있다. 판옥선은 일본의 전선인 세키부네보다 훨씬 크고 화포와 총통 발사가 주력이며 제자리 선회가 쉽고 장갑이 견고한 전선이다. 판옥선 1척에 세키부네는 5척이 붙어야 화포와 총통을 무력화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일본 전선 세키부네는 외해를 건널 수 있도록 설계되어 회전 반경이 크고 내해에서의 전투에는 불리하다.
 

▲ 해남군과 진도군을 잇는 진도대교

▲ 명량정

 

 

▲판옥선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관
▲해전사 기념전시관 우측에 있는 명량대첩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