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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진도 용장성과 용장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4. 9. 19. 11:11

2024년 9월 8일에 대전 한밭문화원 2024년 9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두 번째 답사지로 전남 진도군 군내면 용장산성길 94(군내면 용장리 17-2)에 있는 용장성과 용장사에 다녀왔다. 용장성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이곳 진도로 옮겨와 이곳에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전쟁을 계속하였던 곳이고, 용장사는 석조여래 좌상이 모셔져 있어서 유명한 곳이다. 남한 지역에 흔히 보기 힘든 고려시대 유적지이다. 한밭문화원 덕택에 이곳 진도에 이런 유적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관계자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주차장에 도착하면 왼쪽에 배중손 장군의 동상과 숭의문(崇義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평삼문 뒤로 배중손 장군사당인 정충사(精忠祠)가 있다. 평삼문과 사당은 모두 주심포 맞배지붕으로 지어져 있어서 멋지다. 조금 위쪽에는 삼별초의 역사와 활동을 새긴 고려항몽 충혼탑(高麗抗蒙 忠魂塔)과 조형물이 있다. 우측에는 용장성 홍보관이 있어서 여러 가지 자료를 관람할 수 있다. 홍보관 우측에는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용장산성이 보이며, 뒤쪽으로 올라가면 용장사가 있다. 용장성 주차장은 코리아 루트 서해랑길 6코스의 종점이기도 하다.

 

용장성은 고려 시대에 배중손 장군이 이끌던 삼별초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항쟁을 벌였던 장소이다. 결국 1271년 삼별초는 이곳에서 패한 후 제주도로 옮겨가 항몽 투쟁을 계속하다 1273년에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의해 제압된다. 고려 왕실에 저항했던 저항군이면서 몽골군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었던 점에서 묘한 감정으로 둘러보게 되는 유적지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좋은 점만 보기로 마음을 먹으니 편한다.

 

고려는 1231년(고려 고종 18년)부터 침략해 오던 몽골과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그리고 3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의 전쟁을 벌였으나, 1259년(고종 46년)에 쿠빌라이와 강화를 맺게 된다. 몽골의 지배를 받으며 강화도에 머물던 고려는 1270년(원종 11년)에 개경으로 환도하게 된다. 환도를 반대했던 배중손을 비롯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候 溫)을 왕으로 삼아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 궁궐과 성을 쌓고 몽골과의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때 쌓은 성이 바로 용장성이다. 승화후 왕온(王溫)은 고려 후기의 왕족이며, 후작으로 봉해진 승화(承化)는 현재의 전주시이다.

 

당시 몽골 기마군단의 말발굽 아래 유라시아의 모든 왕국이 초토화됐다. 몽골제국은 정복한 나라의 왕조들을 모두 무너뜨리고 직접 통치했다. 전 세계적으로 드물게 고려만은 현지국의 왕이 통치하게 한 유일한 나라이다. 1271년은 쿠빌라이 칸이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치고 초대 황제가 된 해이기도 한다.

 

삼별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무신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던 고려의 항몽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1227년에 칭기스칸이 사망하고 그 아들 태종 우구데이가 즉위한 후 중국의 금과 남송을 정벌하기 위한 전쟁을 준비하면서 1231년(고려 고종 18년)에 고려를 먼저 침공하게 된다. 당시 무신정권의 최우(崔瑀)는 반대 의견을 누르고 1232년(고종 19년) 7월에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1258년(고종 45년)에 대사성 유경(柳璥), 별장 김준(金俊), 박송비(朴松庇) 등이 무신정권의 최의를 살해하고 왕에게 정치를 되돌리는 무오정변(戊午政變)을 일으켜 최씨정권으로 불리던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한다.

 

1259년(고종 46년)에 훗날 고려 원종(元宗)으로 즉위하는 태자 왕전(王倎)이 강화를 위해 몽골에 입조했고, 헌종 뭉케 사후 황제위 계승 경쟁을 앞두고 있던 쿠빌라이를 만나 고려-몽골 간 강화가 이루어졌다. 이때까지 고려는 6차례나 몽골의 칩입을 받으며 강화도를 제외한 본토는 쑥대밭이 되었다. 30년 동안이나 이 땅에서 극심한 몽골군과의 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1259년 몽골과의 강화에도 불구하고 개경으로의 환도는 1270년에야 이루어진다. 이 때 개경으로의 환도를 반대하며 강화도에 남아 항몽전쟁을 하던 군대가 배중손(裵仲孫)이 이끌던 삼별초이다.

 

배중손(裵仲孫)은 고려 후기의 장군으로, 국왕 원종(元宗)이 몽골의 요구에 따라 개경으로 환도하려 하자, 승화후 왕온(王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 삼별초(三別抄)를 지휘하여 진도(珍島)로 탈주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특별히 선정하여 뽑은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를 별초(別抄)라 하였고, 고려 무신정권 시대에 최우가 자신의 신변 보호 등을 위해 조직한 사병조직이 야별초였다. 몽고와의 전쟁 중에 야별초를 확대해 정규군 조직으로 재편해 좌별초와 우별초로 확대 개편한 후 몽골군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거나 송환된 사람들을 모은 신의군까지 합하여 삼별초(三別抄)라 하였다.

 

지금은 용장산 기슭에 약간의 성벽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으며, 성 안에는 용장사가 있던 절터와 궁궐의 자리가 남아있다. 용장성 안에는 성황산이 있는데, 이 산에도 산성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성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하고 고려의 왕실과 대립되는 궁궐이 만들어진 점에서 가치있는 유적이다.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용장성에 관한 설명을 듣고 전시관을 둘러본 후 용장사로 올라갔다. 용장사에서는 비구니 스님께서 직접 극락전에 올라오셔서 석불좌상에 대해 설명을 해주시고 아마타부처님을 믿고 극락왕생 하도록 법문을 해주셨다. 석불좌상을 모신 극락전과 염불당(念佛堂)이 있고 극락전 앞 마당에는 나한송 두 그루가 있어서 멋지다. 언뜻 보면 금송 같기도 하고 비자나무 같기도 한데 자세히 보니 잎이 우상이 아니고 뭉쳐서 나오고 잎겨드랑이에 열매가 달려있는 나한송이었다.

 

스님의 설명과 극락전 앞에 있는 석불좌상에 관한 안내판에 따르면, 사각형의 대좌(臺座) 위에 사각형 광배를 등에 붙이고 앉아 있는 분은 아미타여래로 연꽃을 들고 있는 본존불과 호리병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과 합장을 하고 있는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1940년경에 용장마을에 사시는 분들이 머리 부분이 없는 상태로 찾아내어 나름대로 시멘트로 머리 부분을 복원하고 움막을 지어 비가림을 하게 했다고 한다. 보살들의 머리에도 보관이 없는 형태이다.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포탈에서 소개하고 있는 용장사 석불좌상(龍蔣寺石佛坐像) 자료에는 약사불로 소개하고 있다. 머리칼은 두건처럼 묘사되었으며, 사각형의 큼직한 얼굴은 짙은 눈썹, 작은 눈, 긴 코, 알맞은 입 등으로 안정되고 투박한 모습이다. 가슴이 빈약하게 처리된 신체는 어깨와 팔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으며, 하체는 너무 높고 커서 고려 불상의 독특한 비례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려 약그릇을 들고 있는 두 손과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발의 투박하고 큼직한 표현은 신체 비례 감각과 함께 불상의 모습을 무척 친근하게 보이게 한다.

 

凸형의 옷주름이 빈틈없이 표현된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목깃을 U자 모양으로 약간 내리면서 반전시켜 변화를 주고 있다. 대좌에는 연꽃무늬가 소박하게 묘사되어 있고, 광배는 의자의 등처럼 보이는데 도식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 좌우에는 본존불과 비슷한 인상으로, 상체는 벗고 하체에 치마를 입은 신라식 보살상이 서 있으나, 고려 불상 특유의 표현법을 보여주고 있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인용문헌: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탈 – 용장사석불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