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해남 고산윤선도 유적지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5. 3. 15. 16:25

2025년 3월 9일(일)에 대전 한밭문화원에서 주관하는 3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두 번째 답사지로 전남 해남군 해남읍 녹우당길 130(해남읍 연동리 102-1)에 있는 해남 고산윤선도유적지에 다녀왔다. 조선조의 문신(文臣)이자, 국문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의 유적지이며, 해남윤씨 종가가 아직도 살고 있는 종택이기도 하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고산윤선도박물관을 둘러보고, 평소에는 개방이 되지 않는다는 종택의 사랑채인 녹우당을 볼 수 있었다. 고산서당, 어초은사당, 추원당을 둘러보았다.
 
해남군에서는 고산윤선도박물관을 설립하여 해남윤씨 소유의 국가유산들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군립박물관인 고산 윤선도박물관은 조선조의 문신이자 국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컫는 고산 윤선도를 비롯해 실용적인 학문을 추구하고 뛰어난 예술적 감각으로 혁신적인 그림 세계를 개척한 공재 윤두서 등 해남 윤씨가 사람들이 남긴 1775점의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박물관 내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유물 사진은 박물관 리플렛의 소개 자료를 사진에 담아 소개하기로 한다.
 
고산윤선도박물관은 한옥 형식으로 건축되어 있고, 1층은 특별전시실이 있고, 지하 1층에는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이 있다. 제1전시실에는 해남윤씨 가문의 고문헌들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고, 제2전시실에는 고산윤선도와 공재 윤듀서 관련 문헌과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해남윤씨가전고화첩, 윤고산수적관계문서, 지정14년노비문서 등 보물로 지정된 많은 문화재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교과서 등에서만 보던 공재 선생의 자화상을 직접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오늘의 문화탐방은 대만족이다.
 
현재 고산윤선도박물관이 있는 고산유적지에는 600년 전통을 이어온 해남 윤씨 어초은파의 종가 고택인 녹우당(사적 제67호), 어초은사당, 고산사당, 추원당이 있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는 은행나무와 비자림, 안채, 행랑채, 헛간, 안사당 등이 있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으나, 덕음산 중턱에 있는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은 약 500년 전에 조성된 것으로 4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고산 윤선도는 8살 되던 해에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 1612년(광해군 4년)에 20세에 승보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서 집권 세력인 이이첨 일파의 불의를 규탄하는 상소인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광해군 15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직하고 이곳 해남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인조 6년(1628년)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왕자사부가 되고 한성서윤과 예조정랑을 역임하는 등 수차에 걸쳐 나라에 중용되었다.
 
병자호란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해남으로 내려와 조상이 물려준 엄청난 재산으로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찾은 금쇄동에 여러 정자와 각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주로 해남의 금쇄동과 수정동, 완도의 보길도에 은거하며 자연에 들어 원림을 경영하고 『산중신곡』 과 『어부사시사』 등 불후의 명작을 써서 국문학의 발전에 큰 공을 남겼으며 은둔 생활 중에 조성한 원림을 통해 전통 조경문화에도 큰 흔적을 남겼다. 효종의 부름으로 벼슬에도 나아갔으나 당쟁으로 다시 유배당하는 등 파란 많은 인생을 살다가 1671년(현종 12년) 85세로 돌아가셨다. 숙종 원년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를 충헌(忠憲)이라 하였다.
 
고산윤선도박물관 홈페이지(https://gosan.haenam.go.kr/ )에 따르면, 고택 녹우당은 덕음산을 뒤로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자리 중에 하나로 꼽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덕음산을 뒤로하고 그 줄기인 성매산, 옥녀봉, 호산을 잇고 들어서 있는 연동 녹우당은 흔히 풍수지리의 산서(山書)에서 말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잘 짜여진 최고의 명당자리로 손꼽히고 있다. 이 터는 고산 윤선도의 4대조이자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시조가 된 어초은 윤효정(尹孝貞, 1476~1543)이 백련동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며, 현재 고산 윤선도의 14대손인 윤형식 종손이 살고 있다.
 
녹우당이 있는 연동 마을은 예전에 연못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인공적으로 조영한 연못이 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백련동(白蓮洞)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연동이라 부르고 있다. 백련동의 형국은 덕음산을 주봉으로 배산(背山)하고 좌우에 그 지맥이 안아 싸고 있는 듯한 형상일 뿐만 아니라 동쪽 계곡에서 원류된 작은 개울이 마을 앞 들판을 흘러 임수(臨水)하고 있으며, 들판 건너 안산(말매봉, 문필봉)이 원경으로 펼쳐져 있어 풍수가 수려한 형국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형국 때문인지는 몰라도 해남 윤씨가는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고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그 전통을 잇고 있다.
 
늙은 은행나무 옆으로 난 높다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녹우당 사랑채가 나온다. 이곳의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녹우당은 고산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이 고산에게 하사한 집으로 고산 윤선도는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다. 고산은 82세 되던 1669년 수원에 있던 집을 뱃길로 옮겨와 다시 복원하여 지었다고 전한다. 본래 호남 지역의 건축 양식은 보통 'ㅡ'자형 집이거나 'ㄱ' 자형인데 녹우당은 서울이나 중부지방 양반가와 같은 구조인 'ㅁ'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때 아흔 아홉 칸에 달하던 녹우당 고택은 현재 55칸 정도만 남아있다. 녹우당은 우리나라 양반 사대부가의 고택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녹우당 하면 고택 전체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나, 녹우당은 이 집의 사랑채를 말한다. 이 건물이 들어섬으로 인해 전체적인 모습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사랑채 현판으로 걸려있는 '녹우당' 이라는 당호는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1662~1723)가 '녹우당(綠雨堂)'이라는 현판을 써준 것으로 이때부터 이 집의 공식적인 명칭이 됐다. 이곳 녹우당은 조선 후기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예술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문인 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 되어 해남의 문예부흥이 이곳 녹우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녹우당의 영역 속에 있는 주 건물로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그리고 안사당, 어초은 사당, 고산사당과 좌측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어초은 추원당이 있다.
 
녹우당의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인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尹斗緖, 1668~1715)를 빼놓을 수 없다. 윤두서는 조선 후기의 화가이며 윤선도의 증손이고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이다.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종애(鐘崖)이다. 겸재 정선(鄭歚),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불린다.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남인 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 서, 화로 생애를 보냈다. 경제, 병법, 천문, 지리, 산학, 의학, 음악 등 각 방면에 능통했으며, 새롭게 대두되던 실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 녹우당 옆의 회화나무
▲ 입구 현판은 고산유물관이다.
▲ 군립박물관
▲ 박물관 내 사진촬영 금지라서 박물관 리플렛에 공개된 자료를 올린다.
▲제1전시실에서 제2전시실로 이동하는 복도에서 바라본 정원
▲ 박물관 리플렛을 올린다.
▲ 고산윤선도 시비
▲ 애기동백 - 꽃봉오리가 통째로 떨어지는 동백과 달리 꽃잎이 떨어지는 애기동백
▲ 녹우당 앞 은행나무 - 중시조 윤효정의 아들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을 기념하여 심은 은행나무라고 한다.
▲ 정문에 해당하는 솟을대문 - 지금은 잠겨있다.
▲ 예전에는 왕께서 양반가에 묘목을 하사하기도 했던 회화나무 - 선비의 배출을 기원하는 나무
▲ 서울 강남 아파트촌의 한강변에도 많이 심어져 있다. - 그래서 강남에 사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나?
▲ 녹우당 사랑채 - 이중처마가 이색적이다.
▲ 앞의 기둥들이 둥근 기둥인 걸 보면 구한말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사를 못해보았다.
▲ 고산사당 - 불천위 사당이다. 양반가의 자랑이다.
▲ 해남윤씨 중시조이신 어초은 윤효정 선생을 배향하는 불천위 사당
▲ 어초은 사당 내부를 살짝 들여다 본다.
▲ 사당 담벼락에 있는 송악
▲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숲으로 가는 길
▲ 추원당
▲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건립했다고 하니 둥근 기둥을 사용한 이유를 알 것 같다.
▲ 추원당 앞의 차밭 - 차나무가 싱싱하다.
▲ 녹우당 앞 은행나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 덕음산을 배산으로 좌청룡, 안산, 우백호가 잘 형성된 명당자리라고 한다.
▲ 유적지 옆 동네를 돌아본다. 당종려와 송악이 반긴다.
▲ 송악
▲백련지와 정자
▲ 연못가에 심어져 있는 비자나무

 

▲ 비자나무 열매
▲ 박물관에서 판화체험으로 찍어온 공재 선생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