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통영시 박경리 선생 생가를 둘러보다.

아진돌 2026. 6. 28. 10:44

2026년 6월 13일(토)에 남파랑길 3구간(고성&통영 구간) 29코스를 걸으며, 경남 통영시 충렬1길 76-38(문화동 328-1)(옛 지명: 통영읍 대화정 328)에 있는 박경리 선생을 생가를 둘러보았다. 삼군수군통제영을 구경하고 여황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 사거리에서 좌측 건널목으로 건넌 후 몇 발자국 더 좌측으로 가면 『토지』와 『김약국의 딸』 등을 지은 박경리 선생 생가가 있는 골목길로 접어든다. 빨간 벽돌집인 생가에는 지금도 누군가가 살고 있는 것 같다. 골목을 지나 우측으로 가면 서포루가 보인다. 서포루로 올라가는 길에는 박경리 선생의 어록인 듯한 글들이 써있다. 하동군에서는 온통 평사리를 배경으로 하는 『토지』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생가가 있는 통영시에서는 주로 통영을 무대로 하는 장편소설인 『김약국의 딸』과 관련된 홍보물이 많다.

 

박경리(1926~2008) 선생은 1926년 12월 2일(음력 10월 28일)에 지금의 경남 통영시 문화동 328번지에서 박수영(朴壽永)과 김용수(金龍守) 사이의 맏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박금이(朴今伊)이다. 아버지는 14살 때 17살 어머니와 결혼하였으나, 아버지는 어머니를 버리고 새로 가정을 꾸려서 박경리 선생은 소박맞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바느질 등을 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지만, 언제나 당당하고 궁색한 법이 없었다고 한다. 1941년에 현재의 통영초등학교를 졸업한다. 박경리 선생의 수필에 보면, “초등학교 때 수업료 때문에 몇 번씩 집에 쫓겨가야 했던 일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부끄러움이겠습니다만, 우연히 장롱 속에서 수업료의 천 배가 넘는 백원짜리 지폐들을 접어서 넣은 전대를 발견했을 때의 슬픔, 돈을 보았노라 했을 때 나를 보던 어머니의 험악한 눈은 타인의 눈이었습니다.”(수필 ‘십이년 만에’)라는 회고록이 있다. 가끔 어머니는 아버지한테 가서 생활비를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1945년 진주공립고등여학교(현재의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생각으로 아버지에게 등록금을 달라고 찾아 갔다가 빰만 맞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지금의 진주여고를 졸업한 이듬해인 1946년 경남 통영군 지석리에서 거제 출신의 김행도(金幸道)와 중매 결혼을 해서 이듬해 딸 김영주를 낳았다. 1948년에 남편이 인천 전매국에 취직하여 인천 금곡동으로 이사한다. 박경리는 이때 책방을 운영하였다. 1950년에는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현재의 세종대학교, 1948년 서울가정보육사범학교로 개편하였다가 1954년에 2년제 수도여자사범대학으로 변경) 가정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황해도이지만 당시엔 경기도에 속해 있던 연안여자중학교에서 근무하였다. 6·25한국전쟁 때 남편 김행도는 공산주의자 혐의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행방불명 되었다. 연이어 세 살 난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후 엄청난 슬픔을 견디기 위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가 있다.

 

이즈음 박경리 선생은 고향 친구가 세 들어 살던 김동리 선생 집에 자주 들르게 된다. 김동리 선생의 부인도 진주공립고등여학교 선배였다고 한다. 친구가 박경리 선생이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버리면서 김동리 선생이 박경리 선생의 글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학생시절에 썼던 단편 「불안시대」를 김동리 선생의 지도로 몇 차례 고쳐 쓴다. 그러던 중 김동리 선생의 아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이 현대문학지에 추천되었으니 빨리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뜬금없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박경리 선생도 모르는 사이에 박경리라는 필명과 「계산」이라는 제목으로 1955년 8월 ‘현대문학’에 게재된 것이다. 김동리 선생의 추천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연락을 받기 전에 이미 박경리라는 작가의 「계산」이 수록된 『현대문학』지를 자기 작품이 수록된지도 모르고 훑어보았다고 한다. 이듬해 8월에는 단편소설 「흑흑백백(黑黑白白)」이 두번째로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하여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한국상업은행을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에 조그만 식료품점을 열고 창작에 몰입하였다.

 

박경리 선생은 1969년 6월부터 한국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대하소설 『토지』 연재를 시작하여, 1994년 8월에 집필 26년 만에 『토지』 전체를 탈고하였다. 총 5부 25편에 달하는 대하소설이다. 1972년 10월 『문학사상』 창간호부터 『토지』 2부를 1975년 10월까지 연재하게 된다. 이해에 『현대문학』지에 연재되었던 『토지』 1부로 제7회 월탄문학상을 받는다. 1973년에는 딸 김영주가 시인 김지하(1941~2022)와 결혼하며, 『토지』 1부를 삼성출판사에서 간행한다.

 

원주에 있는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영주(1946~2025)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유신체제하에서 긴급조치가 내려 정릉집으로 김국태씨 등 문인들이 김 시인을 데려왔어요. 잡히면 고문당해 죽을 것이라면서 숨겨 달라고 했어요. 어머니는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미망인과 처녀 단둘이 사는 집에 어떻게 외간 남자를 들일 수 있었겠어요. 그래 언덕 밑까지 바래다 줬는데… 택시를 타는 모습이 외등 밑에 보이는 것이에요. 순간 쫓기는 몸이 참 불쌍해서 숨겨 주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청혼도 결국 받아들이게 된 것인데 인간적 연민에서라고 할까. 제 팔자이자 운명이지요. 제가 태어날 때 조부께서 복덩이라고 하셨다는데 제 복의 절반만 나눠 주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분은 참 똑똑하고 제 할 일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김영주씨). 김영주 이사장은 1973년 4월에 김지하 시인과 명동성당 반지하 묘역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결혼했다.

 

1980년에 사위 김지하 시인의 옥바라지를 위해 서울을 떠나 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 자리인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에 정착하여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1992년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소설창작론을 강의하였고, 1995년 같은 대학교 객원교수로 임용되었다. 1996년 토지문화재단을 창립하고, 이어서 1999년 토지문화관을 개관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토지문화관은 문학인들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고, 다양한 학술 문화 행사를 기획, 개최해 왔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타계하여 고향인 통영시 산양면에 안장되었다.

 

▲박경리 선생 생가
▲서문고개에서 박경리 선생 생가로 가는 골목길
▲서포루로 가는 길
▲통영 99계단 위에 있는 벽화
▲이 표지판에서는 본명을 朴金伊로 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