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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충남 태안군 태안읍 굴포운하 유적지

아진돌 2015. 7. 23. 16:32

201565일 충남 태안군 근흥면 안흥리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굴포운하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서산에서 태안 방면으로 32번 국도를 가다 보면 팔봉산 입구 삼거리인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어송삼거리를 만난다. 이 삼거리에서 약 100미터 정도 지나서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을 따라 내려간 후 32번 국도 밑을 통과하는 굴을 지나면 개천 옆에 굴포운하 유적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바로 이곳도 굴포운하 유적지이다. 천수만 쪽으로 연결된 굴포운하의 한 줄기이다. 서산에서 태안읍으로 가다보면 언제나 굴포운하를 지나가는 것이다. 안흥을 다니면서 건너다닌 운하를 오늘에야 인식하고 안내판을 읽게 되었다.

 

안내판에 적힌 안내문에 따르면 굴포운하는 고려 인종 12(1134)부터 조선 현종 10(1669)까지 535년간 삼남지방의 세곡을 서울로 안전하게 조운하기 위해 시행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운하 건설의 유적지이다. 태안읍의 동쪽에 위치한 인평리 저수지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가로림만과 인접해 있는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서 다시 태안읍 인평3리 마을 회관을 찾아 시멘트 포장 시골길을 달려가면 제대로 된 굴포운하 유적지를 볼 수 있다. 운하 유적의 많은 부분이 논이나 밭으로 전용되었지만 인평3리에서는 굴포운하의 유적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굴포(掘浦)란 인공 물줄기인 판개를 말하는 것으로 운하라는 뜻이지만 지명이 되었다. 고려 때부터 충청, 전라, 경상도에부터 조운하는 조운선들이 안흥량(安興梁)과 관장항(冠丈項)의 암초로 번번이 난파되는 일이 잦았다. 고려 제17대 인종 12(1134)에 인종은 내시 정습명(鄭襲明)을 보내 군정(軍丁) 수천 명을 동원하여 약 17(7km) 정도의 인공 수로를 만들어 조운에 안전을 기하려 운하의 개척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4km 정도는 수로를 만들었으나 나머지 3km는 암초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공양왕 3년(1391)에 왕강(王康)의 건의에 따라 개척공사를 재개하였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도 운하건설이 재거론 되고 있다. 태조 4(1395)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유경(崔有慶)을 보내 태안군 북쪽에 조선(漕船)이 다닐 수 있는 조거(漕渠) , 운하를 판 곳을 보게 하였는데, 유경이 돌아와 땅이 높고 돌이 있어서 갑자기 팔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태종 12(1412)에 충청도 순제 안흥량에 운하를 파서 조운할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였다. 전라의 조운이 안흥량에서 실패가 많아 예나 이제나 걱정거리였다. 산마루가 처음 시작된 곳에 뚫어서 수로를 통할만 한 곳이 있었으므로 전조(고려)에 왕강이 뚫으려 했으나 그 땅이 모두 돌산이어서 마침내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곳이다. 이제 하륜(河崙)이 건의하였다. “왕강이 뚫던 곳에 지형이 높고 낮음을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제방마다 소선(小船)을 두며, () 아래를 파서 조선이 포구에 닿으면 그 소선에다 옮겨 싣고, 둑 아래에 이르러 다시 둑 안에 있는 소선에 옮겨 싣게 합니다. 이렇게 차례로 운반하면 큰 힙을 들이지 아니하고도 거의 배가 전복하는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김승주가 순제로부터 돌아와 그린 그림을 바치고, “신의 소견으로는 왕강이 뚫던 곳은 모두가 단단한 돌이어서 쉽사리 공효를 거두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내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독단할 일이 못되니 의정부에서 여럿이 의논하여 시행토록 하라.”

 

그 후에도 세조 1(1455)에도 운하 건설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선조 17(1584)에도 굴포(堀浦)를 파서 왕래하거나 세조 때 시행하려 했던 방법을 논의했다. 현종 때는 조운방법에 대한 논의가 재연되어 송시열은 이른바 설창육수(設倉陸輸)안을 제안하였다. 세조 때 논의된 바와 같이 천수만 쪽 옛 순성 근처에 조선(漕船)을 정박시킨 다음 여기에서 가로림만 쪽의 영풍창 옛터까지 육로로 수송하고 다시 선박으로 옮겨 경창으로 가는 방안이다. 이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안흥항과 신진도(新津島) 사이의 안흥량(安興梁)과 소원반도(所遠半島) 끝의 관장항(冠丈項)은 각각 200-300m 의 가까운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수심이 깊은 곳은 10m가 넘는 곳도 있으나 곳곳에 1m도 안 되는 암초가 수면 아래에 도사리고 있다. 여기에 조차(潮差)7-9m에 이르며 조수가 매우 빠르게 흐르는 지역이다(곽호제(2004), 조려-조선시대 태안반도 조운의 실패와 운하 굴착, 지방사와 지방문화121, 역사문화학회). 안흥량은 원래 바닷물이 험하여 선박이 통과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리었는데, 조운선이 이곳에서 누차 치패(致敗)를 보았으므로 안흥량으로 고쳤다고 한다(곽호제, 2004).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안흥량에서의 조운선 침몰 기록을 보면, 태조4(1395)에는 경상도 조선(漕船) 16척이 안흥량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침몰하였다. 태종 3(1403) 5월에는 경상도 조운선 34척이, 6월에는 경상도 조운선 30척이 침몰하였다. 세조 1(1455)에도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침몰하였다. 곽호제(2004)에 따르면 한 번의 사고로 국가 재정의 20-30% 정도의 피해를 입는 규모였다고 한다.

    

아래 첫 번째 사진 다음에 첨부된 그림은 곽호제(2004)가 제시한 태안반도의 조운로이다. 조운선의 사고가 잦았던 곳은 지금의 태안군 안면읍 신야리 남서쪽 끝의 쌀썩은여와 안흥량과 관장항이었다. 태안 굴포운하는 개통하지 못했지만 17세기 후반에 안면반도의 가장 좁은 구간인 현재의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 신온리 사이를 굴착하여 천수만을 통한 조운이 가능해졌다. 원래 안면도는 섬이 아니었지만 이곳을 굴착함으로써 안면도라는 섬이 되었고 쌀썩은여를 피해 조운할 수 있게 되었다. 곽호제(2004)에 의하면 輿地圖書에는 이미 토정 이지함이 이곳에 수일 동안 마물러 산세를 즐기면서 후일에 반드시 굴착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