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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기쁨/풍수학 공부

정역을 지으신 일부(一夫) 김항(金恒) 선생 묘

아진돌 2015. 12. 26. 17:12

 

20151115일에 주역을 공부하는 유성서원의 도반들과 함께 교수님의 지도하에 일부(一夫) 김항(金恒) 선생 묘소를 다녀왔다.  선생의 묘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 산41-1에 있다.  

  

묘 입구에는 기념관처럼 지은 건물이 있고 현재는 후손이 살고 계시다고 한다. 현재의 봉분의 방향으로 보면 자좌오향(子坐午向) 으로 자리잡고 있다. 88향법으로 보면 좌수우류(左水右流)이고 정미(丁未)방 파구이면 자왕향법으로 병오향(丙午向)을 놓을 수 있으므로 좋은 향법이다. 그런데 비문을 보면서 실제 묘는 해좌(亥坐)로 모셔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충남대학교 교수님이셨던 관중 유남상(柳南相) 교수께서 쓰신 비문에 따르면 묘소는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묘소에서 보면 파구 방향에 소나무 몇 그루가 밀집되어 있어서 파구를 정확히 보기가 어렵다. 88향법을 다시 보니 좌수우류일 때 병오(丙午)방 파구일 때 손사향을 놓는 목욕소수(沐浴消水) 자생왕법(自生旺法)을 적용할 수 있다. 아마 파구를 병오방으로 보고 손사향으로 모신 것 같다. 손사향을 놓을 경우에는 앞에 보이는 두 개의 봉우리 중에서 왼쪽의 화형산(火形山)을 안산으로 삼아 해좌로 모실 수 있다. 목욕소수 자생향은 부귀가 발하고 복록이 쌍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수구(水口)가 정확하지 않으면 가볍게 쓰지 못하는 향법이다. 추후에 정역학자들이 주가 되어 비를 세우고 사초할 때 묘 앞을 넓게 정리하면서 봉분의 좌향을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정리한 것 같다.

 

공자께서도 예견하셨고 예견의 말씀에 주희조차도 잘모르겠다고 주를 달았던, 새로운 역인 정역을 지으신 일부 선생 묘소 앞에는 아직도 기념관 하나 건립되어 있지 않다. 비닐 하우스에 정역괘 등 몇 가지 액자들이 전시되어 있다. 서글픈 일이다.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모금운동이라도 벌려야 할 것 같다.   

 

일부(一夫) 김항(金恒) 선생은 광산 김씨로 양천 허씨의 자손이시다. 양천 허씨의 손자이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 1415-1480)13세 손이시다. 김국광의 셋째 아들이신 김극수(金克羞) 선생이 바로 일부 선생의 선조이시다. 김국광의 장자는 김극뉴(金克忸, 1436~1496)이시고 사계 김장생 선생의 고조부 되시는 분으로 순창의 유명한 말 명당에 모셔져 있는 분이다. 양천 허씨의 손자이신 김국광의 세째 아들 김극수 선생의 손인 셈이다.

 

선생께서는 순조 26(1826, 丙戌) 10(己亥) 18(丙子) (己亥) 시에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당골)에서 태어나셨고, 73세셨던 1898년에 부적 부황리에서 돌아가셨다. 정역이 후천개벽 사상을 담고 있다보니 우리나라 민족 종교들이 정역을 내세우며 가르치고 있어서 일반인이나 학계에서는 거리를 두고자 하는 폐단이 생기고 있다. 학계에서는 충남대학교 총장을 지내신 이정호 박사님이 주가 되어 정역에 대한 연구가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았으나, 아직도 정역을 연구하는 분들이 많지 않다. 우리에게 주역을 가르치시는 충남대 명예교수이신 남명진 교수님께서 학문적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계시다. 좀 더 많은 분들이 정역에 대한 연구에 참여하여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꽃이 피기를 희망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879(고종 16) 이운규가 전해준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뜻을 19년 동안의 노력 끝에 스스로 깨우쳤다. 그의 수양방법은 서전 書傳의 정독과 다독, 그리고 영가와 무도(舞蹈춤추는 것)로 인한 정신 계발이었다. 그 뒤 그에게 이상한 괘획(卦劃주역의 기본이 되는 그림)이 종종 나타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기력이 쇠한 탓인가 생각하였으나 점점 뚜렷이 나타나므로 그것을 그렸는데, 그것이 곧 정역팔괘도 正易八卦圖였다. 팔괘의 명사(命寫)가 끝나자 공자의 영상이 나타나 내가 일찍이 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그대가 이루었으니 이렇게 장할 데가 있나.”라고 하면서 무한히 찬양하고, 호를 일부로 하라고 하였다. 이 때가 1881년이었고, 그 해에 대역서 大易序도 얻게 되었다. 1885정역을 완성하였는데, 그 무렵 논산시 연산면 도곡리 국사봉(國師峯)으로 옮기자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0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