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7일에 남명진 교수님의 안내로 주역 도반들과 함께 논산시 노성면의 명재 고택과 종학당과 향적산의 향적산방으로 야외 수업을 다녀왔다. 첫 번째 답사지로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위치한 명재 고택을 다녀왔다. 명재 윤증 선생의 제자들이 지은 집이지만 명재 선생은 실제로 사시지 않았다고 한다. 2017년 9월 9일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전충남지역대학 문화유산답사동아리 학우들과 함께 명재 고택을 다녀왔다. 2017년 하반기 동안 업무가 바빠 정리를 못하고 있다가 해를 넘겨 2018년에 1월 21일에야 정리를 하게 되었다.
2017년 8월 27일에는 현재 고택에 거주하고 계시는 윤완식 님의 안내로 사랑채와 안채를 둘러보고, 안채 대청마루에 앉아 교수님으로부터 명재 윤증(尹拯, 1629∼1714) 선생과 명재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 1610∼1669)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우암 송시열과 친구였던 아버지 윤선거의 강화도 사건인 강도(江都)의 변란(變亂)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와 윤선거 사후에 명재 선생이 스승인 우암 선생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고 이 일로 스승과 제자 간에 거리가 멀어진 일화를 들었다.
이원우(2010)의 석사학위논문과 한국학중앙연구소(http://www.aks.ac.kr/home/index.do) 자료를 기반으로 윤완식 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통해 고택을 소개하면 아래과 같다. 명재 고택은 파평 윤씨의 세거지였던 논산 노성면 교촌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고택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로 소론의 거두였던 윤증(1629∼1714) 때에 지어졌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 등이 명재 고택을 감시할 목적으로 설립했다고 전해지는 궐리사와 노성향교가 인접해 있다. 궐리사는 공자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명재 고택에 대한 석사학위논문인 “이원우(2010), 『논산명재고택 구축단위 연구 - 기본단위부재와 구축단위 중심으로 -』,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건축학 석사논문, 2010년 8월”에 소개된 고택의 개요를 보면 다음과 같다.
o 소재지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서면 교촌리 306번지
o 소유자 : 윤완식(현재 거주자인 윤완식(尹完植)씨는 명재(明齋)의 13세손이다)
o 총대지면적 : 1,363㎡, 총건축면적 : 364.2㎡20)
o 지정별 : 중요민속자료 제190호(1984년 12월 24일 지정됨)
o 명 칭 : 윤증선생고택(尹拯先生故宅)이었으나 논산명재고택(論山明齋古宅)으로 2007년 1월 29일 기점으로 지정명칭이 변경됨.
o 건축연대 : 조선후기인 숙종 조에 건립됨. 1709년으로 추정
이원우(2010)의 논문에서 제시된 명재 고택의 전체 배치도는 아래와 같다.
(원 출처 : 『한국의 전통가옥. 윤증선생고택.』, 문화재청. 2007.에서 발췌 및 정리 )
한국학중앙연구소(http://www.aks.ac.kr/home/index.do) 자료를 보면 아래 그림과 같이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소에서 소개한 명재 고택의 자료를 참고하여 답사 중에 들었던 윤완식 님의 설명을 덧붙이면 아래와 같다.
이 고택은 파평윤씨(坡平尹氏)들의 세거지인 옛 이산현에 있는 이산(尼山)을 배산(背山)하여 인접한 노성향교(魯城鄕校)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집 앞에는 비교적 넓은 바깥마당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인공 방형지(方形池)를 파고 조그마한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한 훌륭한 정원이 꾸며져 있다. 예전에는 바깥 마당에 솟을 대문과 담이 있었다고 전한다. 빨간 색 배롱나무가 있는 바깥 정원에서 4단 석계의 축대를 오르면 오른쪽에 앞으로 돌출한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5량가로 안채의 구조기법과 유사하다. 다만, 화강암 바른층쌓기 한 기단과 네모뿔의 화강암정평초석을 사용한 것이 다르다. 이 집은 모든 부재의 마감이 치밀하고 구조가 간결하면서 견실하여 아름다운 입면과 함께 신선한 맛을 풍기는 조선 후기 주택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전퇴를 둔 2칸의 사랑방이 놓이고 그 오른쪽에 대청이 배치되었다. 사랑채는 큰사랑방, 작은사랑방, 골방, 누마루방, 누마루방 하부 부엌, 대청,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문채에 있는 안사랑방까지 사랑채영역으로 포함된다. 사랑방 좌측에는 하부에 부엌을 둔 누마루방이 있다. 누마루방에는 마당쪽과 연못 쪽으로 큰 창문들이 설치되어 있고 문을 열어 처마에 고정하고 나면 마당의 멋진 경치가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이를 경치를 빌린다하여 차경(借景)이라 한다. 자연의 그림을 빌려온다는 뜻이다. 우리가 방문했던 8월 말에는 마당의 배롱나무의 빨간 꽃이 멋지게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사랑방에서 작은 사랑방으로 건너가는 곳에는 작은마루방이 설치되어 있고 사랑방과 작은마루방 사이에는 평소에는 미닫이 문으로 사용하다가 문 전체를 여닫이 문으로 밀어 열 수 있은 문이 설치되어 있어서 도반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윤완식 님으로 설명으로는 아파트 지을 때도 유용하게 응용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야기 해본 적이 있다 한다. 아주 과학적인 미닫이 및 여닫이 문이다.
사랑채 뒤로 연접하여 사랑채 후면에서 1칸 물려 왼쪽으로 一자형의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중문간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좌측 두 번째 칸에 중문을 내고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게 1칸 돌아 들어가게 하였다. 안채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넓은 대청이 있다. 그 왼쪽으로 2칸 윗방, 2칸 안방을 두고, 오른쪽에는 2칸 건넌방, 1칸 마루방이 배치되어 있다. 좌측의 안방 전면에 4칸의 넓은 부엌을 돌출시켰고, 우측의 마루방 앞으로는 2칸 안사랑방과 1칸 작은부엌을 달아내었다. 대청 좌우익의 각 방들은 툇마루나 마루에 의하여 서로 연결되도록 하였다. 대청의 배면은 심벽으로 처리하고 쌍여닫이 골판문을 설치하여 놓았다. ㄇ 형의 안채는 중문간채와 1칸 떨어져 있어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의 서익(西翼) 바깥쪽에 광채가 있다. 기와를 얹은 맞담이 중문간채 좌우로 뻗어서 이 광채를 포함한 안채의 양측을 둘러쌌고 배후는 야산이 막아섰다. 전체적인 배치는 튼口자의 안채에 독립된 사랑채가 접합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안채는 회반죽으로 마감한 막돌허튼층2단쌓기를 한 기단 위에 화강암 덤벙초석을 놓고 모두 방주를 세웠다. 주상에는 주두 없이 도리와 장여만 있는 민도리집이다. 대청·상부가구는 5량가로 동자주 없이 중도리의 장여를 대량 위에 끼워 걸쳐놓은 간소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종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뜬창방을 올려놓고 그 위에 소로를 놓아 장여와 종도리를 받고 있다.
안채와 곳간으로 쓰인 광채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고랑에는 또 하나의 과학이 숨어 있다. 고랑의 앞쪽은 넓고 뒤쪽은 좁게 만들어져 있어서 바람이 뒤쪽으로 불 때는 속도가 빨라지고 광채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가게 설계되어 있다. 아마 베르누이 효과가 적용된 것 같다. 고랑의 뒤쪽에 가서 앞쪽을 보며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보면 고랑의 폭이 평행하게 보이는 원근법이 적용되고 있다. 또한 안채의 대청마루 중앙에 앉아 보면 문간채에 있는 중문의 밑 부분이 훤히 보인다. 중문에 와 있는 손님의 신발을 보고 손님의 신분을 금방 알 수 있는 방법이다. 또한 안채에서 안체와 사랑채 사이의 틈으로 보면 궐리사 쪽에서 넘어오는 행인들을 바라볼 수 있어서 누가 오고 있는지를 미리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윤완식 님께서 소개하신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사랑방에서 거주하는 남편과 안채에 거주하는 부인이 합방을 할 때는 사랑채에서 “손님 있냐고 전해라”라고 물었다고 한다. 손님이 없다 하면 바깥 주인이 안채로 넘어갔다고 한다. 안채에서 부인이 달거리 중이거나 외부 손님이 와 있거나 몸살 등일 때는 손님이 있다고 답했다 한다. 거꾸로 안채에서 사랑채 주인을 보고 싶거나 상의할 일이 있을 때는 “주안상 봐 놓았다고 전해라”라고 했다 한다. 어떤 때는 시어머니가 손자를 봐야할 때는 주안상을 넣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사랑채 앞 토방에는 해시계가 설치되어 있다.
명재 윤증(1629∼1714)은 성리학자이자 예학자로서 한국 유학사에 중요한 인물이다. 본관은 파평(波平)이고,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峯),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명재의 할아버지는 황(煌)이고,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이씨(公州李氏) 장백(長白)의 딸이다. 아버지와 유계(兪棨)에게 배우고 뒤에는 장인인 권시(權諰)와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29세 때에는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자대전 朱子大全〉을 배웠다. 송시열의 문하에서 특히 예론(禮論)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났다.
명재는 1663년(현종 4)에 천거되어 내시교관·공조랑·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숙종 대에도 호조참의·대사헌·우참찬·좌찬성·우의정·판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그러나 재야의 학자로 현실의 문재를 등한시 한 것이 아니라 현안에 관한 사직 상소를 국왕께 올리는 등 현실의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우암 송시열의 수제자이기도 하고 하곡 정제두의 스승이기도 한 윤증은 후에 실학(實學)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명재 선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 1610∼1669)는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 시인, 정치인이다. 우암 송시열과 함께 신독재 김집의 제자이며, 인조 때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당하였다. 이때 그의 친구들과 그의 아내는 미리 약조한대로 자살하였으나 그는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 있던 아버지를 뵙고 자살하려고 평민의 옷을 입고 성을 탈출하였으나, 남한산성에 도착 하지 못하고 살아남게 되었다. 이 일로 그는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금산(錦山)으로 내려가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스승 사후에도 출사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 학문에 정진하였다.
윤선거가 죽자 윤증은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처자와 친구가 죽었는데도 자기만 탈출한 강도(江都)의 변란(變亂) 사실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는데 자기는 선거에 대하여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하여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하였다. 이로 인하여 윤증과 송시열은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지고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일로 윤증과 송시열 사이에는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반목(反目)을 '회니(懷泥)의 반목' 또는 '회니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윤증은 이산(泥山)에 산 연유로 그렇게 불렸다. 이러한 개인적 감정과 함께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될 때 그를 지지하는 사류(士類)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강도(江都)의 변란(變亂)이란 윤선거(尹宣擧)가 17세 때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청국(淸國)의 사신을 목 베자고 상소(上疏)하여 척화(斥和)의 청명(淸名)을 얻었는데, 병자 호란(丙子胡亂)에 강화(江華)에 들어가서 김익겸(金益兼), 권순장(權順長) 등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김익겸, 권순장 2인은 죽고 그의 처 이씨는 자결(自決)하였으나, 윤선거는 성을 빠져 나와 목숨을 부지한 일을 말한다.
명재 윤증은 우암 송시열을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義利雙行王覇竝用)고 비난했으며,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어 아버지의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젊어서 불문에 들었던 일을 끌어서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가 전부 자신에게 있다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고 윤증을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사림과 간관(諫官) 사이에 비난과 변명의 상소가 계속되었다. 노론·소론 간의 당쟁은 계속되었고, 그가 죽은 뒤 1715년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발문에 정호(鄭澔)가 그를 비난한 것을 계기로 당쟁이 격화, 소론 일파가 거세되고 아버지와 함께 관작이 추탈되었다(가례원류시말). 1722년(경종 2) 소론 유생 김수구(金壽龜)·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하여 복관되었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 1610∼1669)는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현 논산시 광석면 오강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 윤씨로 아버지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윤황(尹煌)이고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서인의 학자 성혼(成渾)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성혼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윤선거는 윤휴의 일로 우암 송시열과 절교하게 된다. 남인 윤휴가 사물의 진리를 주자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를수 있느냐는 발언을 하여 서인과 사림 전체에 충격을 주었다. 이는 윤휴와 같은 남인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653년(효종 4년) 윤선거는 황산서원(黃山書院)에서 송시열·유계(兪棨)·권성원(權聖源) 등과 함께 윤휴의 주자경전주해(朱子經傳註解) 변개(變改) 문제에 대하여 격론을 벌였다. 이 논쟁은 윤휴가 주자의 경전주해에 얽매이지 않고 북송(北宋) 이전의 유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전주해를 하자, 송시열이 이를 주자학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윤선거는 윤휴의 생각도 채택하지는 않더라도 일단 인정해야 된다는 입장이었으나, 송시열과 논쟁이 길어지면서 윤휴를 변호하여 송시열과 대립된 견해를 표명했다. 절친한 사이인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鑴)가 학문적 문제로 대립하자, 중립을 취하여 오히려 오해를 산다. 그 뒤 예송 논쟁 직후에도 양자의 의견을 조정하려다가 송시열에게 윤휴와 결별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송시열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사돈이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혼자 피신한 것과, 예송 논쟁 당시 그가 윤휴의 의견을 두둔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1665년(현종 6) 공주 동학사(東鶴寺)에서 이이(李珥)의 연보를 간행하기 위하여 송시열과 다시 만나,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사문난적론과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服喪) 문제로 비롯된 송시열과 윤휴의 예송(禮訟) 시비를 놓고 재차 논쟁을 벌였다. 1669년 송시열에게 보내는 서신인 〈기유의서 己酉擬書〉를 작성하여, 남인과 서인간의 당쟁을 지양하는 정견을 제시하면서 윤휴와 허목(許穆)의 등용을 주장했다. 또한 송시열에게도 "예론(禮論)에 관계된 윤휴(尹鑴)·허목(許穆) 등과 화해하여 그들이 감복하게 해야 한다." 며 그들을 등용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허목은 윤선도와 함께 송시열을 강하게 비난하며 그를 사형시켜야 된다고 주장했었으므로 송시열은 이를 상당히 불쾌하게 여겼다.
강도(江都)의 변란(變亂)과 관련하여 윤선거 자신이 피력한 이유를 효종실록의 기록을 통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효종 8년(1657년) 12월 19일에 전 진선 윤선거가 상소하여 임금의 부름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아뢰고 이듬해인 효종 9년(1658년) 1월 24일에는 궐문 밖에 와서 상소를 올리고 물러간다. 12월 19일자 윤선거의 상소 내용은 아래와 같다.
신이 상소에서 인용한 진동(陳東)과 윤곡(尹穀)의 일(주: 진동(陳東)과 윤곡(尹穀)은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유생을 이끌고 상소를 한 일과 외적의 침입에 절의를 지켜 죽은 일을 말하며, 두 사람 모두 송나라 때 인물로, 진동은 상소하여 간신 채경(蔡京) 등을 죽이라고 직간하다 죽었고, 윤곡은 절의를 지키다가 몽고의 침입 때 일문이 화를 당했다.《송사(宋史)》 권450, 455.127)은 신이 감히 옛 사람에 스스로를 비기려고 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만난 바가 마침 그들과 같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신이 병자년에 태학에서 두 번 올린 상소는 망령되게 정의를 사모하여 매우 밝고 합당한 듯했으나, 끝내 강도(江都)에서 비겁한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신은 이를 큰 수치로 여기고 있으니, 이것은 이른바 선비가 나라를 위해 반드시 죽을 도리를 무시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계책을 정하다가 포위된 성에 갇히자 똑같이 위험과 치욕을 당한다면 난에 임해 구차하게 면하는 것이 유독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항변하는 문장으로 일을 논한 자는 또한 그 의리가 저절로 다른 사람과 구별이 되는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가령 진동이 윤곡의 처지를 당했더라면 반드시 죽었지 차마 구차하게 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이 상심하고 통곡하는 것도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지, 끝내 지나간 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중부(仲父)(아버지의 형제중 맏형이나 막내가 아닌 분들의 호칭) 윤전(尹烇)은 필선으로 행조(行朝)를 배종하였습니다. 성이 함락되던 날 드디어 송시형(宋時瑩)·이시직(李時稷)과 함께 자결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끝내 강위빙(姜渭聘)·이돈오(李惇五)와 함께 칼날 아래서 죽었습니다. 신이 중부와 한 성에서 서로 의지하고 있었는데, 중부는 죽고 신만 홀로 살았습니다. 영원히 가버린 혼백들이 저승에서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있는데, 신이 헛된 이름을 몰래 취해 외람되게도 거두어 임용해주시는 은명을 입고 있으니, 신이 어찌 차마 스스로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구차히 마음을 편히 하겠습니까. 이 점이 더욱 신이 애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지금 신의 본심을 논하는 자들은 혹 벗과 일을 함께 하고서 벗은 죽었는데 죽지 않았고 혹 처와 죽음을 약속하고서 처는 죽었는데 죽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허물을 이끌고 벼슬하는 데 뜻이 없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 또한 신의 실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벗을 위한 것도 아니고 처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신의 몸이 구차하게 사는 것에 한해서일 따름입니다. 그러니 이른바 신을 아는 사람도 오히려 극진히 아뢰지 못한 점이 있는데, 하물며 구중 궁궐 안에서 소원하고 천한 신의 실정을 어떻게 굽어 살피실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이 노예가 된 상황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지척하여 말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신은 다시 그 점을 진달하겠습니다.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이 남한 산성(南漢山城)에 사명을 받들 적에, 신이 중부(仲父)에게 말하기를 ‘강도가 이미 함락되었으니, 남한 산성도 위태로울 것이다.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남한 산성으로 가서 병든 아버지나 만나 뵙고 죽는 것이 옳겠다.’ 하니, 중부가 말하기를 ‘너는 그곳으로 가서 우리 형을 만나 뵙고 내가 죽기로 작정했다고 말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중부와 마지막 작별을 하고 세완에게 청하여 그의 노예가 되어 함께 갑진(甲津)을 건너 곧바로 남한 산성에 이르렀는데,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의 계책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단지 몸만 욕되게 하였으니, 당일 길가던 사람치고 누군들 그 모습을 다 알지 않았겠습니까. 사방에서 포위한 적병들도 신이 진원군의 노예라고 인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하나의 노예에 불과한 사람을 높이고 총애하여 외람되게 징사(徵士)의 대열에 끼이게 한다면 안팎의 사람들이 보고 웃을 것은 말할 것도 없으니, 실로 다른 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신의 마음가짐과 자취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와 같으니, 부끄럽게 여겨 숨어 있으면서 감히 함부로 나아가지 아니하는 것은 명을 어기는 주벌에 기꺼이 스스로 빠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실로 인정이나 의리의 애통하고 상심한 데서 나온 것으로서 그것이 너무 지나친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대체로 강도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조정에서 신을 처치하는 데 있어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허락하고 애통함을 참는 의지를 가련하게 여겨 구구한 필부의 본분을 지키는 뜻을 변하지 않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만약 변치 못할 것을 억지로 변하게 하고 잊을 수 없는 것을 잊게 한다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과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벼슬길에 나아가게 된다면 부끄러움을 안고 있는 하나의 음관(蔭官)이 되는 데 불과할 따름이니, 조정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신이 바야흐로 명을 어긴 것으로 죽을 죄를 청했는데 이에 감히 이런 말을 입으로 하는 것은, 명을 어긴 신의 본심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고 감히 번거롭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신은 더욱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은명을 받고 관직에 제수된 것이 지금 벌써 열 번이나 됩니다. 부르는 전지가 내려오면 모두 절하고 받았으며, 교지가 반포되면 감히 되돌려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유독 한번도 대궐에 나아가 은명에 감사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관복을 입고 궁궐에 들어가는 것이 욕된 사람이 감히 행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어진 선비에 견주어 은례를 탐하는 것이 천한 신분으로서 감히 감당할 바가 이니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이 실정보다 지나친 수치와 이름과 실상을 살피지 못한다는 혐의는 신이 한가하게 피할 바가 아닙니다. 생각지도 않게 오늘 굽어살펴 온유하게 타이르고 은례를 특이하게 하시니, 감격스럽고 황공합니다. 밝은 태양과 같으신 성상 앞에서 한두 가지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지만 진정한 일이 설만하니 엎드려 있을 수만은 없고, 명을 어긴 죄가 중하니 구차하게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관에게 몸을 맡겨 드러나게 엄한 주벌을 받는 것을 신이 그만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여장을 꾸려 날짜를 계산해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불행히도 갑자기 감기에 걸려 병세가 위중해져서 시일이 지체되었습니다. 엄한 명을 오래도록 머물러 두어 죄가 더욱 쌓였으니, 황공하고 미혹된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현도(縣道)에 의지해 그 길을 통해서 소를 올리려고 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결과적으로 우물쭈물하며 명을 따르지 않은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정은 궁박하고 말은 위축되어 재량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성상께서 얼른 잘못 내리신 은명을 거두고 떳떳한 형벌을 바르게 하여 인신으로서 명을 어긴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즐거운 여행 > 문화유산탐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남 논산시 노성면 종학당 (0) | 2018.01.21 |
---|---|
충남 논산시 노성면 궐리사 (0) | 2018.01.21 |
충남 서산시 해미읍성의 야경 (0) | 2017.11.01 |
전남 여수시 오동도를 들러보다 (0) | 2017.10.22 |
전남 여수시 진남관 유물전시관과 진남관 (0) | 2017.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