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배움의 기쁨/책속의 한줄

한동일(2017), 『라틴어 수업』을 읽다.

아진돌 2019. 12. 29. 10:52


o 한동일(2017), 『라틴어 수업』, 서울: 넥스트웨이브미디어, 초판1쇄 2017.6.30. 초판16쇄 2017.8.13.

     

2018년 12월 25일과 26일에는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을 읽었다. 작년부터 읽어보겠다고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에 넣어 놓았던 책을 이제야 읽게 되었다. 마침 노은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었다. 오랜만에 감동적인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라틴어 책이 아니고 라틴어 수업과 관련한 인문학 책이면서 저자의 주변 이야기를 들려주는 수필집이기도 하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의 공식언어였고, 로마가 멸망한 후에는 가톨릭교회가 그 라틴어를 교회의 공식 언어로 채택하여 사용하였다고 한다.

   

서구인들에게 라틴어는, 우리에게는 사서삼경이나 논어, 맹자 등에 기술되어 있는 고전 한문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라틴어는 로마제국의 공식 언어로서 지금은 죽은 언어에 해당한다. 그러나 죽은 언어가 갖고 있는 특징은 시대에 따른 언어의 의미변화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한문도 역시 그런 장점을 갖고 있다,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창제하여 널리 보급하시면서도 실록 등 기록물은 한문으로 기록하도록 하셨다. 시대가 변해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한문의 힘을 아시고 계셨던 것이다. 라틴어가 고대 서구 문명의 근원이 되고 있는 그리스, 로마의 지식을 담고 있는 기록 언어 수단이라면 한문은 동양의 지식을 담고 있다. 서구인들은 왜 라틴어를 중요시하고 왜 고등학교에서 중요한 과목으로 가르치는가를 보고, 우리에게 한문교육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목차에 있는 제목들만 보아도 멋지다. 제2장의 제목은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이다. 제4장은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 배운다. 라틴어는 현재 쓰이는 언어가 아닌 만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알 방법이 딱히 없다고 한다. 한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자님이 살아계시던 전국시대에는 어떻게 읽었는지 알지 못한다. 일설에 의하면 남쪽 지방에서 건국하여 북쪽으로 천도한 명나라 이전에는 우리와 중국인들이 읽는 한문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저자는 “공부해서 남을 주어야 한다”(57쪽)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익숙한 말이다. 이 외에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고 있다. 장점과 단점이라는 장에서는 강을 건너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한다는 라틴어를 소개하고 있다. 제Ⅶ장의 제목은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이다. 겸손한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고 한다. 겸손은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라고 한다.

   

제Ⅹ장에서는 ‘Do ut des(도 우트 데스)’를 꼭 기억하라고 강조한다. 네가 주니까 내가 준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라틴어는 경우에 따라 동사 어미가 변경되므로 주어가 생략되어도 동사만 보면 주어를 알 수 있어서 ‘네가 주니까 내가 준다’로 해석된다고 한다. 상호성의 원리로 유럽인들과 비즈니스 거래를 할 때 이 말을 사용해보라고 권한다. 트럼프와 아베와 같은 마초이즘 지도자들이 나타나면서 깨지고 있는 국가 간 상호주의 원칙을 우려하면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와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상호주의 원칙이 깨짐으로써 벌어진 인류의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역사라고 말하고 있다.

  

제XIII장에서는 ‘Si vales bene est, ego valeo'라는 말을 소개하고 있다. 로마인들이 편지를 쓸때 애용한 첫 인사말로 당신이 잘 계시다면 잘 되었네요. 저는 잘 있습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제XV장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Carpe Diem을 설명하고 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번진 라틴어로 오늘을 즐겨라로 의미가 정착되었으나 매 순간 충만한 생의 의미를 느끼면서 살아가라는 경구라고 소개한다.

  

제XVII장에서는 ’우리는 북유럽 사회를 부러워만 하지 그들이 미래 세대를 위해 투자하는 제도적·사회적 노력을 간과하고 있다고 한다. 봄날에 산에 가서 나무를 보면 모든 에너지와 역량을 나무의 가장 끝인 꽃과 이파리에 몰아주고 있다. 자연은 그렇게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미래 세대에 모든 것을 투자한다고 강조한다(178쪽). 청소년교육학을 공부하는 나에게는 크게 와 닿는 가르침이었다. 마지막 제XXVII장에서는 ‘Hoc quoque transibit!’ 즉,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로 신은 언제나 인간의 계획보다 더 오랜 시간을 두고 미래를 본다라고 강조한다.

  

라틴어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지 말고 이 책을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태리로 법학을 공부하러 유학가서 이태리어도 모르고 법학 용어도 몰라 고생했던 저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코끝이 찡하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청소년들이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책의 뒷부분에 실려있는 제자들의 글은 감동을 더해 준다. 제자들이 강의를 듣고 용기를 얻어 성공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