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0. 8. 5. 08:32

2020년 7월 25일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에 다녀왔다. 용주사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화산(花山)에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25개 교구의 본사들을 모두 답사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 두 번째 답사지로 화성에 있는 용주사를 다녀왔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차를 몰다 보니 어느 사이에 길가에 있는 용주사 주차장에 진입하였다. 용주사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예불이 진행되고 있었다. 대웅보전 안에는 하안거로 머물고 계시는 많은 스님들이 계셨고, 신도들과 관람객들은 천보루 위에서 같이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우리도 천보루 앞에 서서 예불을 드리다 정근과 희사 시간에 스님들이 대웅보전에서 빠지신 후 대웅보전에 들어가 예불을 계속 드릴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하여 고려 광종 3년(952년)에 소실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에 조선 정조 14년(1790년)에 사일(獅馹)이 팔도 도화주(八道都化主)가 되어 철학(哲學) 등과 함께 팔도 관민의 시전(施錢) 8만 7000여 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145칸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이 절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빌어 주는 능사(陵寺)로 창건되었다(인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고려 광종 3년에 소실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용주사 홈페이지에서는 병자호란때 소실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고려 광종 때는 전국에서 많은 불사가 행해지던 시절이라 이 절이 소실되어 방치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용주사 홈페이지(www.yongjoosa.or.kr)에 따르면,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서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용주사에 대한 소개 글을 보면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 대왕의 효심을 읽을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이신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후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했다고 한다.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게 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고 한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낙성식 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인용 : 용주사 홈페이지 www.yongjoosa.or.kr).

   

용주사는 별도의 일주문은 보이지 않고 사천왕문이 입구이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왼쪽에는 효행박물관이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문을 열지 않아 관람하지 못했다. 사천왕문 정면으로 조선 시대 궁궐 출입문의 구조를 닮은 삼문을 지나게 된다. 삼문 옆으로는 예전의 노비들이 묵었을 방들이 있고 담장이 좌우 옆으로 둘러 있다. 삼문을 지나면 오층석탑과 천보루가 나타난다. 대웅전 앞에 있어야할 불탑이 대웅전 앞의 누각 앞에 모셔져 있는 것도 특이하다. 천보루 누각 밑으로 계단을 오르면 대웅보전이 웅장한 모습을 나타낸다. 대웅보전은 조선 중기말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인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의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동쪽에 약사여래불과 서쪽에 아미타여래불이 협시하는 삼세불로서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었는데 재질은 목조이고 높이 110㎝로 2006년에 개금하였다고 한다. 대웅보전을 바라보고 우측에는 부모은중경탑이 있는 효성전이 있고 그 우측에는 지장전이 있다. 이곳 지장전 앞에도 백중재 백색 연등이 걸려 있었다. 지장전 아래쪽으로는 관음전이 자리 잡고 있다. 관음전 안에는 화려한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대웅보전을 바라보고 좌측에는 삼성각에 해당하는 시방칠등각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전명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다포식 천불전이 있다. 활주로 처마를 받치고 있는 대웅보전과 달리 천불전에는 활주가 없어 건물의 조형미가 돋보인다. 용주사 건물들을 전체적으로 웅장함을 보여주는 조선 중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웅보전에는 원근법이 가미된 것으로 유명한 후불탱화가 있다. 용주사 홈페이지에 보면 후불탱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홈페이지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과장 없는 인체 비례, 사실적인 얼굴 표현, 침착한 설채법(設彩法) 등이 불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인물이 표현에 음영법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즉, 불화는 서양화법과 같은 원근법, 명암법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후불탱화의 인물 표현에 음영을 나타냈다는 것은 불화를 그리는 전문적인 화승(畵僧)의 작품이 아니라 당시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문인화가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고 기술하고 있다. 불화의 제작자에 대해서 과거부터 김홍도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이론도 있는데, 즉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願文) 중의 "민관(旻寬)·상겸(尙謙)·성윤(性允) 등 25인이 탱화를 그렸다"라는 기록을 증거로 김홍도가 아니라 25인의 화승들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이지만 이러한 이설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후불탱화의 제작자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인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대웅보전보탑후불탱삼세여래체탱 화원 연풍현감김홍도(大雄寶殿寶榻後佛幀三世如來體幀花園延豊縣監金弘道)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고 한다. 결국 용주사 대웅보전 후불탱화는 왕명을 받은 김홍도의 주관 아래 민관·상겸·성윤 등의 25인이 참여하여 제작됐다고 하겠다. 끝으로 후불탱의 은자서 축원문은 사자관 글씨체인데 김홍도가 주관자였으므로 그가 직접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인용문헌 : 용주사 홈페이지, www.yongjoos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