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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관촉사

아진돌 2021. 2. 14. 14:56

2021년 2월 13일(토) 설날 연휴 두 번째 휴일에 충남 논산시 관촉로1번길 25(논산시 관촉동 254)에 있는 관촉사에 다녀왔다. 관촉사는 은진미륵불로 유명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논산과 강경을 수없이 지나다니면서도 언젠가는 가보겠지 하다가 이제야 처음으로 들른 곳이다. 평지 가람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니 돌계단이 이어지고 반야루를 지나니 대적광전이 바라보인다. 높이 100미터 정도 되는 반야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관촉사 홈페이지(gwanchoksa,modoo.at)에 따르면 관촉사는 서기 968년 (고려 광종 19년)에 혜명화상에 의해 창건되었고, 혜명화상은 1백여 명의 장인과 함께 970년 석조관음보살상(안내판에는 석조미륵보살상으로 명기되어 있으나, 홈페이지에서는 분명 관음보살상으로 표기되어 있다.)의 조성 공사를 시작하여 1006년(목종 9) 완성했다. 관촉사에 현존하는 건축물로는 미륵전과 대광명전, 삼성각, 명부전, 반야루, 해탈문, 사천왕문, 일주문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일명 은진미륵; 1963년에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4월 20일에 국보 제323호로 지정됨)과 석등(보물 제232호), 배례석(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 석문(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오층석탑, 사적비 등이 있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2층 누각인 반야루를 만나고 누각 아래를 지나면, 2층으로 지어진 대적광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고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다. 영원불변의 진리의 법신불(法身佛)이신 비로자나불과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하는 화신불(化身佛)이신 석가모니불, 수행에 의해 부처님이 되신 보신불(報身佛)이신 노사나불을 모신 전각이다. 호남지방의 절에 모셔진 삼존불과 달리 삼존불의 크기는 내부 전각의 높이에 비해 크지 않고 적절하여 안정감과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신중탱화가 왼쪽 벽에 모셔져 있는 것도 다른 사찰과는 조금 다르다.

 

2018년 4월 20일부로 국보 제323호로 승격된 석조미륵보살입상 앞에는 보물 제232호인 커다란 석등인 광명대와 석탑이 있고 석탑 아래에는 배례석이 놓여 있다. 석탑부터 미륵불까지 일직선으로 바라보며 참배할 수 있는 미륵전이 있다. 미륵전의 정면에는 미륵보살입상이 보이도록 유리창으로 되어 있고 왼쪽에는 신중단이 탱화로 모셔져 있다.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높이 5.45m로 미륵보살입상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은 관촉사 홈페이지에서는 오층석탑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아무리 봐도 4층 석탑으로 보인다. 안내판에는 층수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맨 위 층의 옥개석이 유실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궁금하다. 일부 블로그에서는 옥개석의 체감비로 보아 3층의 몸체와 옥개석이 없어진 듯 하다는 설도 있다. 자세히 보면 그런 것 같다. 석탑 앞에는 유명한 배례석이 있으나, 사진을 제대로 담지 못했다. 사전에 공부를 안 하고 답사를 갔을 때 아깝게 놓치는 일이 이런 경우이다.

 

대적광전 옆에는 지장보살님과 시왕들을 모시고 있는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 우측의 반야산 위쪽으로는 삼성각이 있다. 삼성각은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을 합한 전각이다. 삼성각에는 북두칠성을 축원하는 칠성을 중심으로 홀로 깨우치신 독성 나반존자와 산신을 모시고 있다. 삼성각에서 바라보는 석조미륵보살입상과 저 멀리 보이는 논산 들판이 장관이다. 겨울인데도 딸기 농사를 하는 비닐하우스들이 마치 바다를 연상하듯이 펼쳐져 있어서 더욱 장관이다. 평야 지대에 있는 절인데도 절경을 품고 있는 가람이다. 관촉사에서 보시하고 있는 신축년 새해 달력에 실려 있는 사계절 사진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이렇게 아름다운 절을 가까이에 두고도 이제야 찾아왔는지 후회가 되었다. 앞으로는 계절마다 시간이 되면 찾아와 봐야겠다. 종무소에서 일하시던 보살님이 새해 달력을 기꺼이 가져가라고 흔쾌히 알려 주셔서 더욱 정감이 갔다.

 

관촉사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미륵보살상이 가장 유명하다. 관촉사는 몰라도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누구나 알고 있다. 불상의 높이가 18.1미터, 둘레 9.9 미터로 국내 최대의 석불이다. 천연의 화강석 암반 위에 허리 아랫부분, 상체와 머리 부분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연결하였다. 바닥에서 어깨까지는 11.6미터, 어깨에서 보관까지 4.1미터, 보관높이 2.4미터, 귀길이 1.8미터, 입1.1미터이다. 하체는 원래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있던 원석으로 만들었고, 상체는 계룡석으로 논산시 연산면 고적리 쇠머리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미륵보살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관음보살상으로 보기도 한다. 옛 기록에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이름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불상으로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안내판에서 국가에서 지정한 석조미륵보살입상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관촉사 홈페이지에서는 관음보살상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을 유념하기 바란다. 관촉사 홈페이지에 있는 조성 설화를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현 관촉사에서 동편으로 5리쯤 떨어진 사제촌에 사는 어느 여인이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반야산(홈페이지에서는 반약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반야산으로 고쳐 적음. 이하 같음.) 서북편에 이르렀는데, 그때 어디선가 어린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므로 찾아 가보니 인적은 보이지 않고 땅속에서 큰 바윗돌이 솟아났다. 이때 기이하게 여긴 여인은 집에 돌아와서 자기 여서(女壻, 사위)에게 전하였으며 여서는 다시 관아에 알리었다. 이에 광종은 '아국의 길조이니 불상을 조성하라는 징조이다.' 라고 하였다.

 

옛 절터인 반야산에서 솟아오른 대석은 관세음보살의 영이라고 믿은 광종이 이 돌을 다듬어서 불상을 조상케 하였으니 명실 공히 이 불상은 관음석상이라 할 것이다. 불상을 조성키로 한 조정에서는 발로에 사자를 보내어 석장을 널리 구하였다. 이때 혜명화상이 응모하고 나섰다. 혜명은 공장 백여 명을 동원하여 관음상을 조상하니 무려 37년(광종21년(970)-목종9년(1006))만에 대불사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불상의 이마에 이고 있는 화불은 3척 5촌이고 손에든 연화지는 무려 11척이나 되는 대규모의 불상이다. 또한 머리 위에는 이중으로 된 보관을 쓰고 관의 둘레에는 풍어를 달았다. 이렇듯 우람한 자용의 관음상이 세워지는 과정에도 신묘한 영이가 뒤따랐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 석상은 모두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니 각 부분과 상체, 하체를 모두 따로따로 만들어서 포개 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하체는 낮아서 좌대 위에 올려놓는다 치더라고 그 윗부분을 올려 세우는 일이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혜명화상의 지혜로써 미치는 바가 못 되다. 그런데 하루는 강가에서 두 어린애가 노는 것을 보고 나서 비로소 쾌재를 올릴 수 있었다.

 

애들이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으니 즉, 세 동강의 토불을 크게 만들어서 불상을 세우고 있었다. 먼저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하체를 세우더니, 다시 흙모래를 하단 주위에 널따랗게 모아 올리는 것이었다. 평평한 지반이 만들어지니 토불의 중간부분을 끌어 올려서 먼저 세울 하체에 맞추어 조립하였다. 다시 그 키에 맞도록 흙모래를 모아 올린 다음 토불의 윗부분을 올려놓는다. 그런 뒤에 긁어모았던 모래를 모두 파헤쳐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토불은 우뚝 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혜명은 쾌재를 부르며 환희 용약하였다.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온 혜명은 먼저 기단을 정초하였으며 이어서 아래서부터 차례로 올려 세우니 마침내 관음석상의 조성불사는 원만히 성취되어 회향하였던 것이다. 이때 관음석상을 세워 마치니 문득 큰 비가 내려 석상에 묻어있던 흙모래 등이 깨끗이 씻기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관음석상의 상호는 더욱 아름답고 서기가 충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예경하는 신앙심이 일어났다. 이러한 소문이 퍼져서 참배자가 줄을 이어 성시를 이루었으므로 그 앞에 흐르는 물은 시진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우뚝 솟은 이 관음석상은 우리 겨레의 온갖 고액을 감싸주는 대비 보살상임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관음석상의 미간에 옥호광명이 휘황하여 그 서기가 하늘에 뻗쳤으니 나라가 태평할 때요, 만일 나라에 어려움이 닥쳤을 적에는 온 몸에 땀이 흐르고 연화지도 빛을 잃었다고 한다. 보국안민을 염원하는 관세음의 덕화가 아닐까(출처: 신증동국여지승람권3 은진불우조, 관촉사 홈페이지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