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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관동묘려(寬洞墓廬)

아진돌 2021. 5. 12. 11:30

2021년 5월 8일(토)에 대청호 오백리길 제3구간 호반열녀길에서 만났다. 대전광역시 동구 냉천로 152번길 291(마산동 96)에 있는 관동묘려(寬洞墓廬)는 글자 그대로 보면, 관동(寬洞)에 있는 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지운 작은 집 즉, 재실(齋室)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쌍청당 송유(雙淸堂 宋愉, 1389~1446)의 어머니 고흥류씨 부인의 묘 아래에 제향을 지내기 위해 지어 놓은 재실이다. 양쪽 옆으로 2칸씩의 방과 곳간이 달린 솟을대문 안에 ㄱ자형 평면으로 지어진 관동묘려는 안방과 건넌방, 대청, 부엌 등을 드린 민가 형태의 재실이다. 재실 동쪽편에 류씨부인의 묘소가 있다. 관동은 이곳 마산동의 옛 지명이다.

 

관동묘려 뒤에는 은진송씨 시조이신 판원사 송대원의 증손으로 고려가 망하자 이곳에 있던 처가인 회덕황씨 향리로 내려오신 송명의(宋明誼) 선생 유허비가 있고, 바로 뒤에는 은진송씨 시조 송대원부터 5세 후손인 송극기까지 묘가 실전된 분들을 모시는 사당 추원사(追遠祠)가 있다.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등을 배출한 대전 지방의 명문가 은진송씨 집안의 사당이다.

 

쌍청당 송유의 어머니이신 고흥류씨는 고려말에 남편이신 송극기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4살의 송유 선생을 업고 개성에서 시아버지가 계시는 이곳 회덕까지 내려오셔 후사를 일으키신 분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 분의 묘는 명당으로 남편인 송극기 선생과 함께 모셔져 있다. 원래 시외가인 회덕황씨 집안의 묘자리였는데 밤새 물동이로 물을 퍼 묘를 옮기게 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묘를 썼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오는 묘이다. 회덕황씨가에서는 명당 자리를 빼앗겼다고 회자되고 있는 곳이다.

 

관동묘려는 대전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37호이다. 대전시립박물관 홈페이지(https://www.daejeon.go.kr/his/index.do)의 대전의 문화재/대전의 지정문화재에 소개된 글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관동묘려는 열부(烈婦)로 정려(旌閭)를 받은 쌍청당 송유(雙淸堂 宋愉, 1389~1446)의 어머니 유씨부인이 문종2년(1452) 82세로 돌아가시자 이곳 마산동에서 장례를 지내고 그 옆에 건축한 재실이다. 이 재실은 양옆으로 2칸씩의 방이 달린 소슬 삼문형의 중문(中門)과 ㄱ자형의 재실 건물 등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ㄱ자형 평면의 재실은 중앙에 2칸 통간(通間)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편에 안방과 건넌방을 드린 후 그 안방 옆으로 2칸의 부엌을 드렸다. 구조는 자연석 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생략되고 간결한 납도리 집으로 꾸몄다. 가구(架構)는 전후 평주 위에 낮은 동자주를 놓고 그 위에 종량(宗樑)과 제형대공(第形臺工)을 설치하여 종도리를 받고 있는 5량집으로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룬다. 대청에 "寬洞墓廬"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종도리 장설(長舌) 측면에 "崇禎紀元後 오갑오이월십육일 입주 상량" 이라는 상량문(上樑文)이 있어 고종 31년(1894)에 중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동묘려 오른쪽에는 송명의(宋明誼) 유허비가 있다. 대전시립박물관 홈페이지의 대전의 문화재/대전의 인물에 따르면, 송명의 선생은 고려말 문관으로 자는 의지(宜之), 호는 건재(乾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은진송씨의 선조는 그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기 때문에 고려조에 판원사(判院事)를 지냈고,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진 송대원(宋大原)을 시조로 하고 있다. 송명의는 바로 송대원의 증손자였다. 은진송씨의 족보상으로는 송대원이 시조이나 실질적인 현조(顯祖)는 송명의로 생각된다.

 

송명의는 공민왕(1330∼1374)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남안찰사(嶠南按察使), 사헌부 집단(司憲府 執端)등을 역임하다가 고려의 국운이 기우는 것을 보고 충청도 회덕현으로 은거하였다. 송명의는 송사민(宋斯民)이란 형이 있었는데 송사민은 평산부사(平山府使)를 역임하여 평산공(平山公)으로 칭하였다. 그런데 평산공은 후손이 없었으므로 그의 제인 송명의 후손이 계사하였다 한다. 송사민은 개경에 살다가 조선이 건국되어 한양으로 천도하자 개경에서 서울 반송방(盤松坊 : 지금의 서울시 西大門區)으로 옮겨가 살았다. 아우인 송명의는 회덕으로 옮겨가 살았다. 송명의가 회덕에서 살게 된 것은 회덕이 바로 그의 처향(妻鄕)이었기 때문이다. 송명의의 처는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황수(黃粹)의 딸이었다. 황수는 토성(土姓)인 회덕황씨(懷德黃氏)로 그의 조부인 황윤보(黃允寶) 때부터 이 지방에서 유력한 세력가 집안으로 행세했다. 송명의가 회덕에서 정착한 곳은 토정리(土井里)였는데 지금은 대청호에 수몰되었으며, 수몰되기 전에는 대덕군 동면 신촌리에 해당한다. 송명의가 회덕에 정착하면서 후손이 번성하여 은송(恩宋)이 아니라 회송으로 칭해질 정도에 이르렀다. 송명의의 아들은 극기(克己)고, 손자는 유(淪)였다.

 

유허비(遺墟碑)는 헌종원년(1835) 3월에 14대손 목사 기정(基鼎)이 짓고 써서 세우고 4년뒤에 비각을 지어 단청을 했다 그뒤 글자획이 분명치 못하여 다시 세우고 음기(陰記) 및 전면대자(前面大字)를 옮겨 새겼다. 16대손 정희(正熙)가 추기(追記)하고 17대손 진사(進士) 면노(勉老)가 썼다. 이 비는 원래 토물에 세웠었는데 대청댐이 생겨 수몰되는 관계로 1980년에 대덕군 동면 마산리에 옮겼다. 시립박물관 자료에는 유허비의 내용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관동묘려 뒤편에는 은진송씨 시조 송대원부터 4세 송명의, 5세 송극기까지의 선조들의 묘가 실전되어 이들을 제사 지내는 사당인 추원사(追遠祠)가 있다. 관동묘려 오른쪽에는 토종닭 요리와 매운탕, 순두부를 판매하는 ‘은골할먼네’ 식당이 있다. 다음에 와 보고 싶어서 명함을 챙겼다. 토종닭 요리는 예약이 필요하나 다른 음식은 예약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드라이브도 하고 멋진 대청호 구경도 하면서 식사할 수 있는 곳이라 다음에 꼭 와보고 싶다. 식당 오른쪽에는 최근에 세워진 송경수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단양군수와 청주시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한 분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