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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기쁨/풍수학 공부

회덕황씨 황수(黃粹)의 묘

아진돌 2021. 5. 12. 18:34

2021년 5월 8일(토)에 대청호 오백리길 제3구간 호반열녀길에서 만났다.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산20-1에 위치한 회덕황씨 3세 황수(黃粹)의 묘이다. 황수는 회덕황씨의 시조 황윤보(黃允寶)의 손자이다. 금남정맥에서 분지하여 만인산과 식장산을 지나 방아실로 이어지는 식장지맥에서 갈라져 계족산과 함각산을 따라 내려온 맥에 위치하고 있다. 나경을 가지고 가지 않아 좌향을 살펴보지 못했으나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자리잡고 있다. 두기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데 앞의 봉분이 황수의 묘이고 뒤의 봉분은 부인이신 남양홍씨의 묘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4세이신 아들 황자후(黃子厚)의 묘가 있다. 황자후의 묘는 고려시대 봉분의 특색인 사각형 묘인데 황수의 묘는 원형 봉분이다. 인터넷 자료를 보니 2012년에 사초한 사진이 보인다.

 

회덕황씨 3세 황수(黃粹)는 고려 때 수안군사(遂安郡事)를 역임하였다. 아버지 황연기(黃衍記), 본인 황수, 아들 황자후에 이르기까지 3대 100여년 이상 미륵원을 운영하면서, 길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다. 이러한 후덕한 인심이 충청도의 향풍(鄕風)으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전시립박물관(https://www.daejeon.go.kr/his/index.do) 대전의 문화재-대전의 인물에 기술된 황수(黃粹)에 대한 소개글을 아래에 옮겨 놓았다.

 

 

황수(黃粹)는 고려말 학자이고, 두문동(柱門洞) 현인(賢人)이다. 본관은 회덕, 회덕황씨 시조 윤보(允寶)의 손이고, 연기(衍記)의 아들로 회덕 관동(寬洞) 지금의 대전 동구 마산동(寬洞)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가학(家學)으로 유학에 밝아 목은(牧隱) 이색(李穡), 밀산(密山) 변계량(卞季良) 진산호정(晉山浩亭) 하윤(何崙)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로 왕래(往來)하며 학문(學問)을 닦아 사림들의 높은 신망을 받았다. 일찍이 수안군사(遂安郡事)를 하였다가 만년에 그 선친인 황연기가 중건한 미륵원에서 영호남을 오르내리는 행려자 등을 후대하였다.

 

미륵원(彌勒院)은 본시 1332년(고려 충혜왕2년)부터 1352년(고려 충정왕3년)까지 매년 겨울에 원(院)을 열어 여행자를 도왔으며 황연기가 죽은 뒤에도 공(公)의 형제는 선친의 뜻을 받들어 사재를 들여 낡은 원을 새로 중건하여 행려자들이 여름에도 더위를 피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두 형제는 미륵원의 남쪽 부근에 따로 새 건물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남루(南樓)라 하였다. 이와 같은 황수 부자의 선행을 목은 이색은 미륵원남루기(彌勒院南樓記)에서 전(前) 지수안군사(知遂安郡事) 황수가 편지로써 한산(韓山) 목은 이색에게 요청하기를 "수(粹)의 부(父)가 일찍이 우리 고을에 미륵원을 지었으니 즉, 1332년 임신년부터 중건하여 경영한 것이 1351년 신묘년까지 매양 겨울에 행려자에 베풀다가 명년 추칠월(秋七月)에 병이 나서 여러 아들을 보고 이르기를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받아 미륵원을 수리하여 혹시라도 내 뜻하는 바를 떨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하고 고요히 운명하였다. 그래서 나의 형님 셋이 있는데 아버지 뜻을 받들며 주선하는지가 지금 30년이나 되었다. 무리를 모집도 아니하고 공장(工匠)도 구하지 않고서 집을 짓는데 옛것을 다 헐고 새로이 하니 그 규모는 다른 원에 비하면 아름답게 꾸며졌다.<다른 원(院)이란 이 근방에 광도원(廣道院)(유성 부근) 불현원(佛峴院)(도마동 부근) 창덕원(昌德院)(회덕 서면 부근) 형술원(荊述院)(회덕 북면 부근) 총지원(寵止院)(회덕 일도면 부근) 여아원(餘兒院)(회덕 남면 부근)을 말한다. 이러한 원은 지금에는 없어졌다>

 

여름에 야채 나물을 대접하고 겨울에 탕을 대접하기는 옛날에 비해 더 낮을 것이 없어 선친의 뜻에 위배되지 않다며 또 생각에는 여름에 당하여 손님들이 이 원을 지남에 쉬는 장소가 시원한 곳이 없어서 이점이 다 잘못된 점이라며 이에서 남루를 건립하여 루(樓)가 완성되었다 하고 또 생각컨대 찬 샘물이 없어 그 마음을 청정(淸正)할 곳이 없으매 마음에 큰 걱정을 하였는데 꿈에 이인(異人)이 나타나서 샘물이 나오는 곳을 가르쳐 주어서 과연 샘물이 솟아 나왔다 하니 과연 천지감응(天地感應)의 힘을 얻어서이다. 이것으로 족히 징법될 것이라 하여 남루기(南樓記)를 지은 것이지만 이색은 말하건대 베풀음을 좋아하는 자는 인인(仁人)이오. 장자(長子)의 처사(處事)이다. 집이 있어 풍우(風雨)를 피하고 루(樓)가 있어 더위도 피하며 탕(湯)도 있고 찬샘도 있으며 채소도 입에 알맞고 하여 행려자들이 황씨에 은혜 받은 바가 많았다. 황씨부자는 부자간에는 자효(慈孝)하고 형제 간에는 우공(友恭)하여 널리 사람들에 은혜를 베푸른 일이 이와 같으니 사관(吏官)들은 마땅히 기록해야 옳다고 보아 이색이 사관(史官)의 일을 계승하여 이에 기록한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이 홍무(洪武)14년 즉, 서기 1381년 2월에 일이니 고려 우왕(禑王) 7년 신유년이다. 여기에 제영(題詠)을 한 학자 이름이 19인(人)이나 되는데 모두 거유(巨儒)들이다. 열거하면 韓山 李益○, 晉山浩亭 河崙, 文山 柳穎, 檜谷 趙墳, 晉陽郊隱 鄭以吾, 西原 韓尙德, 星山 李稷, 晉州 鄭 , 竹溪 安純, 丹陽 張子崇, 密山 卞季良, 獨谷 成石璘, 平壤雨亭 趙樸, 晉陽後學 河濱, 迷老友平陽 朴可恒, 河東 鄭隣趾, 後孫 生員黃待輿, 尤庵 宋時烈, 後孫守愚齋 黃寔 등이다. 지금도 그들의 제영(題詠)들이 편액(扁額)으로 걸려 있다. 이와 같이 중앙집권 거유(巨儒) 선정(先正)들의 글이 걸려 찬한 것으로 보아도 공(公)의 수준이 얼마나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公)의 자(子) 자후(自厚)(1363∼1440)는 세종조 문신으로 태평성세를 이룩하는데 역할이 컸고 또한 부친인 공(公)의 뜻을 이어서 미륵원과 남루에서 행려자를 위해 도와준 일은 그 후대에 까지 정훈(庭訓)으로 전해왔으며 더구나 자후(自厚)의 아들 유(裕)는 태종의 부마로서 당시 지위가 높았다. 또 공(公)의 서(壻)는 은진인(恩津人) 송명의(宋明誼)이다. 오늘에 와서도 공의 사실은 남루기에 담아 전하고 있는 것이다.《자료 : 南樓記 同題詠, 大田市史》《權寧遠》대전시립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