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8일(토)에 대청호 오백리길 제3구간 호반열녀길에서 만났다.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산20-1에 위치한 회덕황씨 4세 황자후(黃子厚)의 묘이다. 황자후는 회덕황씨의 시조 황윤보(黃允寶)의 증손자이며, 황수(黃粹)의 자이다. 황수의 묘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금남정맥에서 분지하여 만인산과 식장산을 지나 방아실로 이어지는 식장지맥에서 갈라져 계족산과 함각산을 따라 내려온 맥에 위치하고 있다. 분묘는 직사각형 봉분 형태이다. 좌향은 확인하지 못했다.
대전시립박물관(https://www.daejeon.go.kr/his/index.do) 대전의 문화재-대전의 인물에 기술된 기록을 전제하면 아래와 같다. 황자후(黃子厚, 1363〜1440)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선양(善養), 또 노직(魯直)이고 본관은 회덕(懷德)이다. 공(公)은 수안군사(遂安郡事) 황수(黃粹)의 아들이다. 공(公)은 1363년(공민왕12년) 계묘생으로 증정부인 남양홍씨(洪復圭女)의 몸에서 태어났다. 태종때 음서로 벼슬길에 나가 인녕부사윤(仁寧府司尹), 성주(星州), 공주(公州), 이목(二牧), 호조참의(戶曹參議), 충청도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 이조판서(吏曹判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 등을 역임하였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 )는 정2품 관직이다. 그 중에 1412년(태종12년) 임진에는 형조좌참의가 되어 호패법(戶牌法)을 제정하여 전국에 시행하게 하니 즉 오늘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이었다. 1414년에는 호조참의·경기도관찰사·개성유후 사부유후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공안부윤(恭安府尹)이 되어 동전의 사용을 건의하였다. 1416년(태종16년)에는 가짜 약재 구입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전의감제조로서 여기에 연루되어 귀양갔다가 두 달만에 풀려났다.
1421년(세종3년) 신축년에는 좌군총제(左軍摠制)가 되어 정조사(正朝使)의 부사(副使)로 명나라에 가게 됐는데 세종대왕이 공(公)을 불러 말하기를 경(卿)이 앞서도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지금 또 경을 보내는 것은 경은 약리학(藥理學)에 정통한 까닭이다. 명나라에 가서는 본국에서 생산하지 못한 약을 널리 구하여 오게 하라고 하였다. 하니 대개 공(公)이 본시 의학에 정통하고 오래동안 전의관(典醫官)을 겸임하였던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공(公)은 명나라에 가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이며 약종자를 가져와서 재배케하였다 한다.
1422년(세종4년)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환상미(還上米)를 함부로 준 죄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나주목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몇해 동안은 벼슬이 없었던 것 같다. 1431년(세종13년) 신해년에는 한성부윤을 거쳐 중추원 부사가 되고 1436년에는 동지중추원사, 이듬해 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이 무렵 침구의 전문직을 둘 것을 건의하였다. 1438년 노령으로 은퇴하였다. 의약에 정통하여 항상 전의감(典醫監)의 제조(提調)를 맡았다. 공(公)의 아들 유(裕)는 이는 태종(太宗)의 11째 따님 숙안옹주(淑安翁主)와 결혼하여 부마로서 회천위(懷川尉)가 되었다. 이러한 까닭에 공(公)은 전의감 제조를 더 오래 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1440년(세종22년) 경신년에 졸(卒)하니 향년이 73세였다. 시호는 혜의(惠懿)이다.《자료 : 世宗實錄, 大德郡誌, 大田市史,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墓誌》 《崔槿默》(대전시립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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