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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대덕구 삼정동 여흥민씨 민여검의 묘

아진돌 2021. 3. 21. 13:02

2021년 3월 19(금)에 대청호 오백리길 제1구간 두메마을길을 걷는 도중에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강촌마을에 있는 여흥민씨(驪興閔氏) 민여검(閔汝儉)의 묘를 둘러보았다. 운촌공(雲村公) 민여검(閔汝儉, 1564~1627)은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자는 종례(宗禮), 호는 운촌(雲村), 운곡(雲谷)이다. 곽산 군수(郭山郡守)와 울산 부사(蔚山府使)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년) 평안도 곽산 군수로 재임 중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기 위한 안현(鞍峴, 길마재) 싸움에서 전공을 세운 바 있다(삼정동에 세워져 있는 운촌공 민여검 묘역 설명문에는 162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으나 오식으로 판단된다).

 

민여검(閔汝儉)에 대한 기록으로는 목민심서에 울산부사로서의 치적이 언급된 바 있고, 인조실록 인조 2년(1624년) 2월 4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곽산 군수(郭山郡守) 민여검(閔汝儉)은 사람됨이 깨끗하고 굳세었는데 혼조(昏朝) 때에 괴원(槐院)에 있다가 흉악한 무리들에게 거슬려 죄를 받았다. 반정한 뒤에 수령의 직임을 맡겨주기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변란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강개하여 국난을 구제하러 나아갔다. 안현(鞍峴) 싸움에서는 자못 전공이 있었으나 원수와 서로 틀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훈적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당시 논의가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인조 4년(1626년) 10월 3일자 승정원 일기에 따르면 “민여검만은 아직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경우처럼 논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없으므로 감히 성상의 재결을 여쭙니다 하였는데,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해에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포상되었다.

 

대덕문화원 홈페이지(http;//ddcc.or.kr/)의 ‘대덕의 인물’에 소개된 민여검(閔汝儉)의 소개글을 여기에 옮겨적으면 다음과 같다. 민여검은 군수 민사용의 7남으로 태어났는데, 7세에 어머니를,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 민여임을 따라 공부하여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급제한 후 한동안 회덕 선영의 동쪽 경운리에서 우거하며 호를 운촌 또는 운곡이라 했다. 여흥민씨 운촌공파의 시원은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여검은 1608년(선조41) 음보로서 남부참봉을 지내다가, 1613년(광해군5)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권신 이이첨 등의 뜻에 거슬려 10여 년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비변사의 요청으로 승문원정자·박사·전적 등을 역임하였으나 권신 이이첨과의 불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바뀌게 되자 그는 비로소 출사하여 곽산 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선봉장 박영서, 평안감사 이상길, 삭주 부사 민인길 등과 함께 활발하게 활동하여 황주, 삭주 등지에서 공을 세웠으나, 난이 평정된 후 도리어 지체했던 자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울산부사로 복직되었고, 전공이 인정되어 인조 4년에는 가선대부(종2품)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호패법의 시행에서 명부 작성이 기한 내에 되지 못했다 하여 서울로 송환되었는데, 그가 가는 도중 정묘호란이 일어나 모든 요새가 연이어 함락되었음을 듣고, 울분 끝에 충청도 괴산에서 병사하였다. 성품이 깨끗하고 검소하여 옷이 허름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일생을 오직 충의와 애민으로 일관하였다 하며, 업무 처리가 뛰어나고 성품과 행실이 깨끗하였으며, 충성심이 높고 치적이 우수하여 품복을 특사 받았다. 묘소는 대덕구 삼정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