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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옥천서원(星州君 玉川書院)

아진돌 2021. 6. 19. 15:47

2021년 6월 13일에 경북 성주군 용암면 대봉2리에 있는 옥천서원(玉川書院)을 다녀왔다. 해인사 가는 길에 성산이씨 도반의 안내로 들르게 되었다. 옥천서원은 성주군 용암면 대봉5길 33(대봉리 776)에 위치한 성산이씨 의성공파 종중의 서원으로 경북 기념물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옥천서원은 성주목사로 추증된 성산이씨 의사(義士) 이사룡(李士龍, 1612-1640)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정조 20년(1796년)에 사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 따르면, 숙종 18년(1692년)에 성주목사와 관내 사민(士民)들에 의해 이사룡이 살았던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충렬사(忠烈祠)로 처음 건립된 것에서 연유하며, 정조 20년(1796년)에 사액되었다. 고종 8년(1872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19년 직계후손들의 집성촌인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고 한다. 성산이씨 서울 화수회 홈페이지에 소개된 글에 따르면 정조 17년(1793년)에 창건된 후 정조 20년에 사액을 받았으며 향사일은 음력 3월 중정(中丁) 즉, 음력 3월 중순에 드는 정일(丁日)이라고 한다.

  

서원은 집성촌을 바라다 보이는 산록 경사지에 위치해 있으며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과 동서재(東西齋)가 앞에 있고 뒤쪽에 사당이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방식으로 건립되어 있다. 행의문(行義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옥천서원(玉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인 충의재(忠義齋)가 있고 충의재를 좌우에는 유생들이 거주하며 공부했던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있다. 서재는 양현재(養賢齋)이고 동재는 현덕재(賢德齋)이다. 뒤쪽에는 상절문(尙節門)이 있고 그 문 뒤에 사당인 충렬사가 있다. 강당에서 충렬사로 직접 연결된 길은 없고 옆으로 돌아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강당 우측에는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중건되기 이전에 사당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가묘(家廟)가 있다. 가묘 앞에는 배롱나무 고목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성산이씨 집안의 사당으로 예전에는 이 집안으로 시집오는 분들이 이곳에 와서 조상님들께 새로 가족이 되었음을 고하고 배향을 하였다고 한다. 

  

최근에는 경상북도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본 서원의 배향인물인 이사룡의 역할은 조선후기에 이루어진 숭명사상의 중요한 하나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학적으로 매우 주목될 수 있다고 판단되며, 또 지금까지의 문화재지정은 최상급의 양반들에 관한 것들이 많이 지정되어 왔음을 감안해 볼 때 서민은 아니더라도 서민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양반층의 언행(言行)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자료로서 판단되어 경상북도에서 기념물로 지정하게 되었다.

  

충렬사에 배향되고 있는 이사룡(李士龍, 1612-1640)은 본관이 성산(星山)이고, 할아버지는 수문장 이유문(李有文)이며, 아버지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위한 공으로 무과에 오른 이정건(李廷建)이다. 1640년(인조 18)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포사(砲士)로 징발되었는데, 금주(錦州)에서 명장(明將) 조대수(祖大壽)와 대전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은혜를 생각하고 공포(空砲)로 응전하였다. 이를 본 동료가 적극 말렸으나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다면서 듣지 않았다.조선 인조시대의 청나라의 강압에 의해 대명(對明)전쟁에 파견된 조선군으로 참전했다가, 임진왜란 때의 명의 구원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며 공포(空砲)를 쏘다 청군에게 발각되어 참살당한 의사(義士)이다. 정조 17년(1793년)에 정조는 이사룡을 성주목사에 추증하고 정려(旌閭)를 하사했으며, 정보 20년(1796년)에 그를 모시는 사우(祠宇)가 충렬사(忠烈祠)로 사액되었다.

  

정조실록 44권 정조 20년 6월 24일 기록에 따르면, 이사룡(李士龍)의 충렬사(忠烈祠)에 현판을 하사하고 방백을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충렬사는 성주(星州)에 있었다.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무의공(武毅公) 유극량(劉克良)의 숭절사(崇節祠)의 사례에 따라 똑같이 현판을 내릴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증 목사 이사룡의 충렬(忠烈)에 대하여 모든 후하게 표창하는 방법에서 무엇인들 아끼겠는가. 비록 유극량의 숭절사와 같은 이왕의 사례가 없다 하더라도 마땅히 의리에 흥기되어 시행해야 될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어찌 금법(禁法)의 유무를 따지겠는가. 특별히 현판을 하사하라." 하였다.

   

처음 이사룡을 위해 건립되어 사액되었던 충렬사가 있었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작촌마을에는 현재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옥천서당이 건립되어 있으며, 그 앞쪽에 “대명충신조선의사성산이공지유허(大明忠臣朝鮮義士星山李公之遺墟)”라 새겨진 마름모꼴 단면의 유허비와 근래에 후손들이 세운 유허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이사룡과 관련된 기사가 많이 보인다. 인조실록 인조 19년 5월4일자 기사에 보면 영병장(領兵將) 유림(柳琳)이 금주위(錦州衛)에 도착하여 서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성주(星州)의 군사 김득평(金得平)은 대포를 쏘아 맞히지 못했고, 이사룡(李士龍)은 포탄을 제거한 채 공포(空砲)를 쏘았는데, 감호(監胡)가 알고 매우 노하여 이사룡은 참수하고 김득평은 장형(杖刑)에 처했다고 한다.

  

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7월 27일 기록에 보면, 고 의사(義士) 이사룡(李士龍)을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추증하고 그 마을에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그의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 명장(名將)으로는 충무공을 맨 먼저 손꼽을 것이지만 군사 출신으로서 천하에 이름난 사람으로는 오직 이사룡이 그 사람일 것이다. 사룡은 성주 사람으로 일찍이 군적(軍籍)에 편입되었는데, 적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 상황에서 금주(錦州)에 가서 싸울 것을 요청하였다. 거기서 명(明)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와 대치하고 있다가 실탄을 재지 않은 공포를 쏜 것이 적군에게 발각되어 적군이 여러 차례 칼질을 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세 차례를 이와 같이 하고 끝내 적군에 의해 죽고 말았다. 명나라 장수가 이를 염탐하여 알고는 장대에다 특별히 ‘조선 의사 이사룡’이라고 써서 걸었었다.

  

아, 신사년의 전투에서 만일 사룡이 한 번 목숨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장차 후세에 무슨 할 말이 있었겠는가. 옛날 당(唐)나라 위사(衛士)가 순절(殉節)한 일을 두고도 주자(朱子)는 오히려 그를 표창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작은 나라의 군사로서 명나라를 위하여 의리를 지켜 순절하여 특출하게 우리나라의 빛나고 걸출한 인물이 되었는데 신분과 문벌이 미천한 관계로 아직껏 표창하는 은전이 빠졌으니 어찌 풍교(風敎)를 세우고 이륜(彛倫)을 열어주는 뜻이겠는가. 성주 포수 이사룡에게 특별히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추증하고 이어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의 마을에 정문을 세우도록 하며, 그의 후손 가운데 벼슬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우선적으로 군문에 등용시키고 보고하도록 하라.

  

저번에는 본주 목사(牧使) 제말(諸沫)의 고적(古蹟)을 보고 감회가 일어 정문을 세워주고 벼슬을 추증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또 이사룡의 일로 인하여 생각해보니 본주에 대명동(大明洞)이라고 일컫는 마을이 있다고 들었다. 이는 바로 임진 왜란 때 우리 나라를 원조해준 중국군 시문용(施文用)이 살던 옛터라고 한다. 문용의 아버지 윤제(允濟)는 병부(兵部)에서 벼슬하면서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공(石公)098) 이 주장한 우리 나라 원조 정책을 힘껏 도왔으며, 문용은 군사 사이에서 숱한 공을 세우고 그대로 우리 나라 사람이 되었다. 선조(宣祖) 때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고, 선조(先朝) 때는 참판을 추증하면서 ‘시문용 후손들을 천역(賤役)의 명단에 이름을 두지 말라.’고 전교하셨다. 그곳에 또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고 어찌 똑같은 예로 그의 자손들을 녹용할 방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증 참판 시문용의 후예들을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불러 보고 올려보내게 하도록 하라. 내일은 곧 이 제독(李提督)의 사당에 향사하는 날이다. 촛불을 켜게 하고 그 제문을 쓰노라니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감상이 떠올라 점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이다. 증고(贈誥)099) 에도 내일 인보(印寶)를 찍을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