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용문산 용문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2. 1. 29. 13:43

2022년 1월 23일(일)에 경기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로 782(용문면 신점리 625) 용문산 밑에 있는 용문사(龍門寺)에 다녀왔다. 용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며, 마의태자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고목으로 유명하다. 은행나무를 보러 꼭 와보고 싶었던 절인데 이제야 참배를 하게 되었다. 입구 주차장에서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사시예불에 참석하기 위해 앞에 가는 신도분의 차를 따라 템플스테이 주차장까지 차를 몰고 올라갔다.

 

10시에 맞추어 올라갔는데도 대웅전에서는 천수경 독송이 끝나가고 있었다. 아마 사시예불을 10시 이전에 시작한 것 같다. 대웅전에 공양미를 올리고 삼배를 올린 후 예불에 참석하였다. 감기에 걸리신 스님께서 쩌렁쩌렁하는 목소리를 힘차게 염불을 해주시니 우리도 역시 같이 힘이 났다. 25교구 본사 답사를 하면서 직지사와 백양사에서 우렁차게 예불을 올리시는 스님들이 생각났다. 화엄성중 정근까지 올리던 백양사에서의 사시예불 의식 때와 같이 이곳 용문사에서도 부처님 전에 예불을 올린 후 성중단을 향해 예불을 올리며 화엄성중 정근까지 진행하였다. 감기가 심하게 드셔서 중간에 차를 드시면서도 힘차게 예불을 진행해 주신 스님께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예불을 마친 후 거목 은행나무를 둘러보았다. 고목이라기보다는 거목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1,100여년이나 자란 고목이지만 지금도 나무의 수세(樹勢)가 예사롭지 않다. 은행나무 옆에 세워놓은 안내판을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큰 은행나무라고 한다. 이 은행나무에 대한 설화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경순왕 후손인 나로서야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갈 때 심었다는 설화를 믿고 싶다. 예전에는 은행을 몇 가마씩 주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무 아래에 은행 열매들이 그대로 쌓여 있어서 은행 특유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용문사(龍門寺)는 913년(신덕왕 2)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하였다. 그러나 일설에는 649년(진덕여왕 3) 원효(元曉)가 창건하고 892년(진성여왕 6) 도선(道詵)이 중창하였다고 하며, 또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1378년(우왕 4) 정지국사(正智國師) 지천(智泉)이 경천사(敬天寺)에 있던 우왕이 원각(願刻)한 대장경판을 이곳에 옮겨 세 칸의 대장전(大藏殿)을 지어 봉안했으며, 1395년(태조 4) 조안(祖眼)이 중창하였다.

 

1447년(세종 29)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모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를 위하여 보전(寶殿)을 짓고, 불상 2구와 보살상 8구를 봉안한 뒤 이듬해 경찬회(慶讚會)를 열었다. 수양대군은 이 법회에 참석하여 기도하던 중 불사리(佛舍利)의 방광을 목격하고 이 절을 원찰(願刹)로 삼았으며, 1457년(세조 3) 퇴락한 법당과 승방(僧房)을 중수하였다. 1480년(성종 11) 처안(處安)이 중수하였으며, 1890년(고종 30) 봉성(鳳城)이 조대비(趙大妃)의 외호를 받아 중창하였고, 1893년에도 한 차례 중창하였다.

 

1907년 의병 봉기 때 모든 건물이 불타자 취운(翠雲)이 큰방을 중건하였고, 1938년 주지 홍태욱(洪泰旭)이 대웅전, 어실각(御室閣), 칠성각, 기념각, 요사채 등을 복구하였다. 6·25전쟁 때 용문산 전투로 다시 불에 탔으나 1958년에 다시 재건하였다. 그 뒤 1983년 지장전, 범종각, 일주문 일부를 중수했고, 관음전과 요사를 보수하였다. 그 중 지장전은 1994년에 완공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지장전, 관음전, 삼성각, 종각, 요사채, 일주문(一柱門) 등이 있으며, 옛 절터에는 주춧돌이 산재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531호로 지정된 정지국사부도(正智國師浮屠) 및 비가 있으며, 산신각 동쪽에는 부도 5기가 있다. 이 밖에 이 절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30호로 높이 42m, 가슴높이 둘레 14m의 큰 은행나무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이곳에 들러 심었다고 한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용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