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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정암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2. 5. 28. 14:55

2022년 5월 23일(월)에 강원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10(고한읍 고한리 2)에 있는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에 다녀왔다. 대한불교 조계종 25교구 본사 참배를 마치고 우리나라 8대 적멸보궁을 참배하기 위해 다녀왔다, 태백산 정암사는 함백산 서북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김상영(2021)에 따르면, 태백산 정암사는 비교적 뚜렷한 창건 연기를 지니고 있는 고찰이다.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삼국유사에는 자장(慈藏)과 정암사의 관계를 밝히는 다양한 기록이 전한다. 창건주 자장과 함께 수마노탑(水瑪瑙塔)은 정암사의 사격(寺格)을 상징하는 대표적 성보 유산이다. 수마노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정암사는 ‘5대 적멸보궁’이자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성지(聖地)의 하나로 손꼽힌다. 정암사는 정선군과 함께 10여 년 동안 수마노탑의 국보 승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수마노탑은 2020년보물 제410호에서 국보 제332호로 승격 지정되었다(출처 : 김상영(2021), 태백산 정암사의 역사와 사격((寺格), 불교와 사회, 13(2), pp.69-115).

 

사시예불을 드리기 전에 사찰 경내를 둘러보려고 일찍 도착했다. 시주할 공양미를 준비하는 곳에서 사시예불을 어느 전각에서 드리냐고 물어보니 적멸보궁에서는 9시에 시작한다고 한다. 문수전과 관음전, 조사당 등을 참배하고 적멸보궁 전각에서 사시 예불을 드렸다. 예불을 주관하시는 스님께서 중간 중간에 예불 예절을 가르쳐 주셨다. 축원할 때 특히 영가 축원 등을 할 때는 꼭 절을 하라고 지도해 주셨고, 축원문의 연후(然後) 이후에는 절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새롭게 배웠다. 또한 석가모니불 정근 때는 10번 절하는 것보다 석가모니불을 진심으로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는 것이라면서 정근 중에는 절을 하지 말고 일념으로 석가모니불을 부르도록 지도해 주셨다. 예불문에 대해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고 가르쳐 주시는 분도 없으셨는데 이번에 많은 것을 배웠다. 한달 정도 늦게 찾아온 함백산 밑의 봄날에 꽃가루 엘러지 때문에 연신 콧물을 닦으시면서 예불을 올리시는 스님과 함께 사시예불을 제대로 드릴 수 있어서 흐뭇했다. 공양간에서 맛있게 차려진 한식 뷔페식 점심 공양을 맛있게 먹고, 수마노탑을 참배하고 내려왔다. 스님의 따뜻한 가르침을 들으며 참여했던 정암사 참배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신라의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라고 하였다. 아침에 대송정에 가니 문수보살이 내현하여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라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정암사이다. 이 절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장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떨어진 방포(方袍)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시자(侍者)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나무라자 거사는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여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거사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고 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가 사자보좌로 바뀌었으며, 그 보좌에 올라 앉아 빛을 발하면서 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쫓아가 고개에 올랐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죽었는데, 뼈를 석혈(石穴)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또, 창건에 관한 일설에는 자장이 처음 사북리 불소(佛沼) 위의 산정에다 불사리탑(佛舍利塔)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붕괴되므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설상(雪上)으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水瑪瑙塔), 적멸보궁, 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本堂)을 세우고, 이 절을 갈래사라 하고 지명을 갈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 절은 창건에 얽힌 전설 외의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이 자장율사의 신심에 감화되어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으로 갈래산에 비장해 두었다가, 자장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이 돌로써 탑을 건조하게 했다고 하여 마노탑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물길을 따라 이 돌이 반입되었다고 해서 수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운 목적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또 이 절에는 금탑과 은탑의 전설이 있다. 정암사의 북쪽으로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는데, 그 가운데 금탑, 은탑, 마노탑의 3보탑이 있다고 한다. 마노탑은 사람이 세웠으므로 세인들이 볼 수 있으나, 금탑과 은탑은 자장율사가 후세 중생들의 탐심(貪心)을 우려하여 불심이 없는 중생들이 육안으로 볼 수 없도록 비장(秘藏)하여 버렸다고 전해진다. 자장율사는 그의 어머니에게 금탑과 은탑을 구경시키기 위하여 동구에 연못을 파서 보게 했는데, 지금의 못골이 그 유지이며 지상에는 삼지암(三池庵)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 밖에도 적멸보궁 입구의 석단에는 선장단(禪杖壇)이라는 고목이 있다. 이 나무는 자장율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심은 뒤 수백 년 동안 자랐으나 지금은 고목으로 남아 있다. 신기한 점은 고목이 옛날 그대로 손상된 곳이 없다는 것인데, 다시 이 나무에 잎이 피면 자장율사가 재생한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