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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나주 금성관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3. 2. 18. 13:32

2023년 2월 12일에 한밭문화원을 따라 나주 탐방 여행을 가서 전남 나주시 금성관길 8(과원동 109-5)에 있는 나주목의 객사 정청인 금성관(錦城館)을 둘러보았다. 금성관은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신이 묵던 곳이라는 설명이 있다. 지난 2017년 4월에 다녀온 후 6년여만에 다시 찾았다. 문화관광해설사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중요 임무 중의 하나인 나주 홍보도 잘하고 계셨다. 나주곰탕, 나주 배와 멜론, 영산포 홍어 등을 소개해주셨다.

 

금성관이 있는 지역은 지금은 잘 정비되어 있다. 나주목 관아의 정문에 해당하는 외삼문인 망화루를 지나면, 중간에 맞배지붕의 중삼문(中三門)이 있다. 중삼문에서 바라보면 좌측과 우측에 날개 건물을 거느리고 있는 금성관이 보인다. 금성관 앞에는 내삼문(內三門) 터가 있으나 건물은 없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나주군청으로 사용했다 하니 일본인들의 나쁜 짓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금성관 뒤편에는 65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예전에는 은행도 귀중한 열매였을 텐데 지금은 나무 아래에 수북이 쌓여 있다. 두 나무 모두 암 은행나무라서 떨어진 은행이 엄청 많았다. 망화루와 중삼문 중간의 서쪽 담 쪽에는 많은 비석들을 모아 놓은 곳이 있다.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 사마교비(駟馬橋碑)도 있고 많은 공덕비 중에는 철로 만들어 세운 철비도 있다.

 

금성관 안내문에 따르면, 금성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조선 초기 목사 이유인(李有仁, 1487.4.~1489년 재임)이 망화루와 함께 건립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 김개 목사가 1617년 4월 21일에 중수하고 1775년 이명중 목사가 개수하였다고 한다. 나주목의 정청인 금성관은 조선시대에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망궐례를 행하던 곳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군 청사로 사용되다가 1963년 보수를 거쳐 1976년 전부 해체 복원하였다고 한다. 이후 금성관 복원 정비사업으로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 청사를 헐고 금성관의 동쪽 날개 건물인 동익헌과 서쪽 날개 건물인 서익헌을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동익헌은 출장 온 문관들이 묵었던 곳으로 벽오헌(碧梧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서익헌은 무관들이 묵었던 곳이다.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 따르면, 나주 금성관은 조선시대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망궐례를 행하던 객사 건물로서,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각종 기록과 구조양식으로 보아 전체적인 건축물의 규모와 골격은 1617년 중수 시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고 추정되며, 목조 가구와 세부 공포형식은 1775년과 1885년 중수 시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금성관은 주심포계 양식의 요소를 채용한 익공계 공포 구성이 돋보이며, 1출목 3익공식의 공포형식은 제한된 공력으로 충분한 위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변형 기법으로 볼 수 있다.

 

월대와 평면 및 입면 그리고 천장 등을 일반적인 객사와는 달리 궁전의 정전과 유사하게 구성한 점은 금성관만의 고유성을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다. 금성관 정청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팔작지붕을 하고 있어서 일반적인 맞배지붕의 정청과 대비되는 희귀성을 갖는다. 이 점은 부근에 위치한 나주향교 대성전이 일반적인 조선시대 향교 대성전의 맞배지붕과 달리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점과 함께 지역적인 특수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인용문헌: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 – 나주 금성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