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0일 대전 한밭문화원의 12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8번지에 있는 충주 미륵대원지에 다녀왔다. 예전에 중원 미륵리사지로 불리다가 2011년 7월에 충주 미륵대원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석조여래입상과 오층석탑, 사각 석등, 팔각 석등, 석조귀부, 당간지주 등이 있는 유서 깊은 사찰지와 고려 때 역원(驛院)이 있었던 자리가 인접해 있다고 하여 미륵대원지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불자로서는 아쉬움이 크다.
발굴 과정에서 ‘대원사(大院寺) 주지’라는 글자가 찍힌 기와가 출토되었으나, 아직도 이 사찰의 명칭을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창건 시기나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유물들을 통해서 고려 초기에 창건되어 조선 후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가람 배치 구조를 가진 절터이자, 석조와 목구조를 결합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유일한 유적이다. 석굴사원으로서 방식은 다르지만, 석굴암을 모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갔는데,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도록 돌에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이곳에서 석굴을 지어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유물들의 특징 등을 알게 되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폐허가 된 사찰지를 방문하면 듬성듬성 세워져 있는 유물들을 보면서 썰렁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곳은 아담한 가람에 온 것처럼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접하지 못하던 유물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새롭게만 느껴졌다. 예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들이 어렴풋이 떠오르는데, 그동안 발굴이 이루어져서 그런지 그때와는 전혀 다른 곳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갓을 쓰고 계시는 석조여래입상이 아니었으면 옛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 같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사찰지에는 길이 9.8m, 너비 10.75m, 높이 6m의 인공으로 쌓은 석굴 형식의 불전이 있다. 석굴 중앙에는 대좌를 두어 석불입상을 봉안하고, 측면과 후면 석벽의 중앙은 감실(龕室)처럼 만들어 작은 불상들이 부조되었다. 석굴 상부는 목조 건물로 지어 천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절터에는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문화재가 있다. 양식적으로 보면 고려 초인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형이 북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사원은 북향을 하고 있으며, 사원 전체가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1977·1978·1982년 3차례에 걸쳐 시행된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여러 명문 기와와 건물지 발굴을 통해 사찰의 성격이 밝혀졌다. 특히 ‘미륵대원’이라고 한 것은 동쪽에 역원(驛院)이 있었기 때문인데, 말을 묶어 둔 마방시설, 여행자 숙소 등 역원의 건물터도 함께 발굴되어 사찰과 역원의 기능을 합친 고려 초기의 중요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충주 미륵대원지)
사찰지로 들어가면 계단 형태로 이루어진 가람 배치에서 가장 뒤쪽에 모셔진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忠州 彌勒里 石造如來立像)을 만난다. 고려 초기에 이 부근에서 많이 만들어진 불상들과 양식적 특징을 같이 한다고 한다. 모두 5개의 돌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1개의 얇은 돌로써 갓을 삼았다.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긴 살구씨 모양의 눈, 넓적한 코, 두터운 입술 등은 고려 초기 커다란 불상의 지방화된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신체는 단순한 옷주름의 표현이라든가 구슬같은 것을 잡고 있는 손의 묘사 등에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함을 느낄 수 있다.
석불 앞에는 고려 시대 초기에 세워진 오층석탑이 있다. 자연석처럼 보이는 기단 위에 1층 옥개석을 제외한 탑신과 옥개석은 모두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으로 노반(露盤, 머리 장식 받침)과 복발(覆鉢, 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다. 노반은 6층 지붕돌로 보일 만큼 큼직하고, 복발은 반원 모양이다. 정상에는 머리 장식의 중심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긴 쇠꼬챙이 모양의 찰간(擦竿)이 남아 있다.
자연석으로 조각한 거북이 형상의 석조귀부(石造龜趺)와 사각 석등도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귀중한 유물이다. 석조귀부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귀부로 원위치의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것이라 한다. 현재 비신은 남아 있지 않으며 비신꽂이 홈이 조성되어 있으나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어서 실제 비신이 있었는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귀갑문은 표현되지 않았고 거북 등 좌측 경사면에 2마리의 새끼 거북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새끼 거북이가 보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실감하였다.
사각 석등은 고려 시대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홍수로 쓸려 내려갔던 것으로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고려의 수도 개경에는 다수 있으나 남한에서는 이곳 한 곳에만 있는 사각 석등이라고 한다. 나도 처음 보는 듯하다. 사각 모서리마다 원주형 기둥을 세워 옥개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참고자료: 국가문화유산포탈 – 충주 미륵대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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