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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삼척시 공양왕릉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3. 11. 21. 19:40

2023년 11월 19일(일)에 대전 한겨레산악회를 따라 해파랑길 7구간(삼척·동해 구간) 31코스를 걷기 시작하기 전에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번지에 있는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에 다녀왔다. 궁촌레이바이크역 주차장에서 바라보면 보이는 능이다. 공양왕릉은 두 곳이 있다.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공양왕릉을 검색하면 두 곳이 올라온다. 이곳 삼척시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번지에도 있다. 고려가 망하면서 슬픈 역사를 간직한 왕릉이다.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의 공양왕릉 소개글에 따르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재위 1389∼1392)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에 원주로 추방되었다가 1394년(태조 3년)에 삼척부 즉, 지금의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로 유배되었다가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곳 궁촌리에는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지는데 임금이 유배된 곳이라 하여 궁촌, 마을 뒷길 고돌산에서 살해되었다고 하여 살해재, 왕자 석이 살았다는 궁터, 말을 매던 마리방 등이 그것이다. 해파랑길 31코스를 따라 삼척로를 따라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만나는 고개가 살해재이다. 지금은 사래재라고 표기되어 있다.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와 경기도 고양시 두 곳에 있는 공양왕릉은 문헌의 기록이 부족하여 어느 쪽이 왕릉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고양시의 능은 조선 왕조가 인정한 능으로 고릉(高陵)으로 불리고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삼척시의 공양왕릉은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이나 둘 다 조선시대 문헌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삼척시 왕릉에 대한 기록은 1662년(현종 3년) 삼척부사 허목의 『척주지』와 1855년(철종 6년) 김구혁의 『척주선생안』이 있다. 그리고 3년마다 공양왕릉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남아있다.

 

이곳 삼척시에 있는 공양왕릉은 공양왕과 공양왕의 동생, 아들 2명, 그리고 말 또는 시녀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봉분 1개를 포함한 4개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별도의 둘레돌(호석(護石))이나 문인석은 없고, 제물 진설을 위한 직사각형의 초라한 상돌(상석(床石))이 공양왕릉 앞에 놓여 있다. 이곳 능은 1995년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공양왕은 폐위되면서 공양군으로 불리다가 살해된 후 22년만인 1416년(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봉해졌고, 고양현에 왕과 왕비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경기도 고양시의 공양왕릉은 쌍릉 형식으로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과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이 있다. 이 호랑이 상은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왕릉인 태조와 태종 무덤의 것과 양식이 비슷하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다시 봉해진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으나, 삼척부에서 고양현으로 시신을 옮긴 이야기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 나는 당시 조선의 시대상으로 유추해 보면 시신은 이곳 삼척시 공양왕릉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명나라의 주원장은 원나라 공주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공양왕의 즉위를 축하했었고, 태조는 공양왕으로부터 왕권을 선양 받은 것으로 명분을 세우고 있었다. 명나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서 공양왕으로 봉하면서 봉분을 조성하였지만, 살해된 공양왕의 시신을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록을 중시하던 조선에서 고양시에 봉분을 조성하면서 시신을 옮긴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공양와릉에서 바라본 전망 - 좌청룡이 너무나 빈약하다.
해파랑길 31코스인 삼척로에서 바라본 공양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