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2일 대전 한밭문화원의 11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본성동, 진주성)에 있는 진주성을 둘러보았다. 진주성 북문인 공북문(拱北門)에서 문화관광해설사님을 만나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쌍충사적비, 촉석루, 의기사, 의암에 관한 해설을 들으며 둘러보았고, 국립진주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진주성관리사업소의 진주성 안내 리플렛을 보면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大捷, 크게 이기는 것)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의 현장이자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적 118호로서 남강변 절벽 위에 세워진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지이다.
문화재청의 소개자료에 따르면,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진주의 성지(聖地)이다. 원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金仲光)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에 경상감사 김수(金수:1537∼1615)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현재는 성의 둘레 1.7㎞의 내성만 복원한 상태이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 창열사, 의기사, 북장대, 서장대, 영남포정사 누각, 국립진주박물관, 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 촉석문, 공북문, 호국사 등이 있다.
외성을 쌓은 다음 해인 선조 25년(1592) 10월에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1554∼1592)이 3,800명의 군사로서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3만여 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왜적 10만여 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선조 37년(1604)에는 합포(合浦, 마산(馬山))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5년까지는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진주성)
정문이라 할 수 있는 공북문(拱北門)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문이라고 한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동상 앞에서 공북문과 충무공 김시민 장군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김시민(金時敏) 장군은 안동 김씨로 현재의 충남 천안시 병천에서 출생하였고 진주대첩에서 총상을 입고 돌아가셨다.
촉석루로 가는 도중에 남쪽 성벽 쪽에 있는 쌍충각(雙忠閣)을 둘러보았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성주목사 제말(諸沫)과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홍록(諸弘祿) 장군의 충의를 기리는 비가 있다. 본래 이 비는 일제강점기 때 관헌들에 의해 방치되어 있었으나 1961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비각을 세웠다고 한다.
촉석루 북쪽 담에서는 촉석루 옛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어서 흥미로운 옛 사진 몇 장을 담았다. 촉석루는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이다. 남강변 절벽 위에 세워져 있으며,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라고도 한다. 현재의 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73년에 재건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국보 제276호였다고 한다.
입구는 솟을삼문으로 되어 있고 누각은 팔작지붕의 와가건물로서 정면 5칸, 측면 4칸의 누각으로 아래층 주춧돌이 모두 화강암으로 설치되어 있다. 대들보를 오대산에서부터 이곳으로 기차로 실어 오는 과정에서 기찻길 옆의 집들이 많이 부서져 그것을 배상하는데도 많은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누각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고 안쪽에는 南將臺(남장대) 현판과 영남에서 가장 경치가 좋다는 뜻의 嶺南第一形勝(영남제일형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누각에서 남강을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답다. 동쪽에는 커다란 수(帥)자가 쓰여있는 장수의 깃발인 수기(帥旗)가 걸려있다.
촉석루를 둘러보고 문화관광해설사의 안내로 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기사(義妓司)로 가서 일행 모두가 잠시 묵념을 올리고 설명을 들었다. 의기사는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 사당은 사액 사당으로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적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열 손가락에 모두 반지를 끼고 있는 논개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현재 모셔져 있는 논개 표준영정은 충남대학교 회화과 명예교수이신 윤여환(尹汝煥, 1953~ )께서 논개의 본관인 신안주씨(新安朱氏) 용모 유전인자를 토대로 제작한 것이다. 2006년 1월에 진주시와 논개의 출생지로 알려진 전북 장수군이 공모를 통해 제작하여 2008년에 표준영정으로 지정받아 모셔지게 되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논개 표준영정”을 검색하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예전에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도 진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논개 사당은 전북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산3번지에 있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주논개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이다. 1973년에는 성역화 작업이 승인되어 장수읍에 2만여 평의 대지를 마련, 논개 사당을 이전하고 담장과 삼문을 세우고 단청까지 말끔하게 단장하였다.
의기사를 참배하고 촉석루 밑의 남강에 있는 의암으로 내려갔다. 의암은 남강의 물 위에 떠 있는 바위로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이다. 국가문화유산포털의 소개자료에 따르면,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는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유인하여 이 바위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논개의 순국정신을 현창하기 위해 영남사람들이 의암이라고 명명하였다.
의암 위쪽 바위에는 진주의암사적비(晉州義巖事蹟碑)가 있다. 이 의암사적비는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문은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 1683∼1746)이 지은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 논개의 순국정신을 한층 더 흠모케 하고 있다. 이 비의 비문에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진주의암사적비)
진주박물관을 관람하고 공북문으로 돌아오는 길에 북장대, 영남포정사 문루 등을 둘러보았다. 문화탐방 시간이 촉박하여 촉석루 뒤쪽에 있는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진주성 우물, 북쪽 성벽 등과 진주박물관 뒤편에 있는 서장대, 호국사 등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호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호국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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