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전하는 아진돌(AginDoll)의 일상 이야기

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철원 도피안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4. 1. 15. 18:11

2024년 1월 14일(일)에 한밭문화원 2024년도 1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강원도 철원군 도피동길 23(동송읍 관우리 423)에 있는 도피안사에 다녀왔다. 도파안사(到彼岸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철원 쪽에 갈 때마다 국보인 철조비로자나좌상을 보러 가보고 싶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이번 기회에 가게 되었다. 1985년까지는 민통선 지역이라 민간인 출입이 안되어 갈 수 없던 절이다.
 
강원도 철원군 화개산에 자리잡은 도피안사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경문왕 5년(865년)에 도선대사가 창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도피안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온 천지가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다. 정말 피안의 세계에 도착한 것처럼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모두들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제법 사찰의 모습이 갖추어져 있어서 일주문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천왕문을 지나 아직 현판도 없고 금강역사상도 설치가 안된 문(안내판에서는 해탈문이라 칭하고 있음 - 어리석도다. 어찌 금강역사가 없다고 말 했을까? 모든 것이 공(空)임을 깨닫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들어가라는 높은 뜻을 나중에야 알고 부끄럽지만 덧붙입니다. )을 통과하면, 대적광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오르게 된다. 대적광전 앞마당에는 커다란 고목이 서 있다. 법당 앞에 서니 포근함과 함께 하얗게 내린 눈이 우리를 축복해 주는 것 같아 저절로 힐링이 되었다.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조비로자나좌상을 보는 순간 철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해 지어 보이시는 미소에 반하고 말았다. 뚱뚱한 몸매의 풍만한 불상이 아니고 갸름한 얼굴에서 품어져 나오는 미소는 참배객들을 사로잡는다. 보기 드문 미남불이다. 철로된 좌대를 모두 가릴 정도로 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 무척 아쉬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적광전, 극락보전, 삼성각, 천왕문, 범종각, 일주문과 요사채가 있다. 대적광전 옆에는 아미타 삼존불을 모신 극락보전이 있었다. 아미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도 모두 철불로 조성하여 봉안되어 있었다. 이 철불들도 후세까지 오래오래 잘 간직하여 후손들에게 큰 선물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극락보전 뒤로는 삼성각이 있다. 문화재로는 창건 당시 조성된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이 있다.
 
도파안사의 창건과 철조비로자나불, 삼층석탑에 관해서는 전문가들이 작성한 참고문헌을 인용하고자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소개된 도피안사 소개글을 보면,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수록되어 있는 사적기에 의하면, 도선이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고 하였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았더니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으므로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오래도록 국가의 비보사찰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1898년 봄에 큰 화재로 전소된 뒤 주지 월운(月運)이 강대용(姜大容)의 도움을 받아 법당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승료(僧寮)와 누헌(樓軒) 등을 중수하였다.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된 뒤 주지 김상기(金相基)가 중건하였으며, 1959년 15사단장이었던 이명재 소장이 15사단 장병과 함께 재건하였다. 현재는 군에서 파견된 군승과 주지 김상기가 관리하고 있지만, 그동안 휴전선 북쪽 민통선 북방에 위치하고 있어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
 
대피안사를 상징하는 철조비로자나좌상에 관해서는 문화재청의 국가문화유산포털에 잘 소개되어 있다. 철조비로자나불 소개글에 따르면,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 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 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 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도피안사 삼층석탑은 도피안사 법당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그 구조가 특이해서 보통 4각의 돌을 이용하는 데 비해 여기에서는 8각 모양의 돌로 높게 2단을 쌓았다. 아래층 기단의 8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단의 맨 윗돌에는 위층 기단을 괴기 위한 높직한 8각의 괴임 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에는 연꽃무늬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기단의 꾸밈새에서 보이는 특이한 양식,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탑을 만든 시기는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절을 건립할 당시 불상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도피안사에 관한 일화 중에 나무위키에 소개되어 있는 이명재 장군과 관련한 내용은 신기하여 여기에 전제한다. 도피안사는 1898년에 화재로 불탄 후 중건되었다가 1950년 6.25 전쟁 때 다시 한 번 폭격을 받아 불타고 절 자체가 폐허가 되면서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던 이 불상도 함께 폐허 속에 파묻혔었다. 그러다가 불상이 발견된 경위가 상당히 극적인데, 1959년 이명재(李明載) 당시 육군 15사단장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내가 지금 땅속에 묻혀 있어서 너무 답답합니다. 나 좀 꺼내 주시오."라고 하였다.
 
거기다 이 꿈을 꾸고 난 후 이튿날 이명재 장군이 전방 순찰을 나갔다가 갑자기 갈증을 느껴 민가에 들렀는데, 집주인의 모습이 꿈 속에서 만난 불상과 너무나 흡사했다. 정말 놀란 이 장군이 장병들을 데리고 집주인과 함께 꿈 속에서 들은 대로 폐허가 된 절터로 찾아 갔는데, 놀랍게도 절터 바닥에는 불상의 육계가 땅 위에 솟아 있었다. 이에 이명재 장군이 데려온 여러 장병들이 불상을 끌어 올리려고 했으나 워낙 땅 속에 깊이 박혀있던지라 불상은 꿈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명재 장군이 바깥에 드러난 불상의 얼굴을 정갈하게 씻은 뒤 자신의 군복을 벗어 입혔더니 그제야 불상을 꺼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인연 덕분에 철불을 다시 도피안사에 봉안하고, 이명재 장군이 절 재건을 지원했다고 한다. 지금도 도피안사 대적광전 안에는 이때 발견했던 철불과 함께 이명재 장군 그리고 당시 불상을 처음 발견했던 연대장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인용 출처: 나무위키 –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한 때 개금불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서 저자는 철불에 금을 덮어 씌움이 아쉽다고 평하였다. 유홍준 님이 문화재청장이 되자, 2007년부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개금층 등 외부 피막을 제거하고 철불의 상태로 환원하는 보존사업이 진행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 참고문헌을 참고하기 바란다. 네이버 등에서 논문 제목으로 검색하면 보존처리 과정과 함께 칼라 사진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홍종욱 외(2009),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의 보존처리,” 보존과학연구 30, pp.171-187, 2009.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