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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문화유산탐방

강화 광성보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4. 3. 13. 21:27

2024년 3월 10일 대전 한밭문화원에서 주관하는 2024년 3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강화도 유적지들을 다녀왔다. 지금은 인천광역시 광화군에 속해 있는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고려시대인 1232년(고려 고종 19년)에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천도하여 39년 동안 사용한 고려궁지가 있고, 조선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의 유배지이기도 하였으며, 강화도령 철종이 출생한 곳이다. 조선 말기에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 등 외침을 받아 항거하던 곳이며, 일본과의 굴욕적인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곳이다. 충청 지방의 두 명문 가문인 파평윤씨 가문의 윤증 선생과 은진송씨 가문의 우암 송시열 선생 간 반목의 원인이 된 병자호란때 있었던 강도(江都)의 변란이 일어난 곳이다. 6·25 한국전쟁 때는 수많은 황해도 피난민들이 삶을 이어갔던 곳이기도 하며, 지금은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다.

 

3월 문화탐방에 참여한 97명이 문화관광해설사 두 분의 설명을 들으며 광성보, 강화역사박물관과 고인돌 공원, 용흥궁공원에 있는 고려궁지, 용흥궁, 천주교 성지인 강화성당, 성공회강화성당 등을 둘러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돌아오는 길에는 조양방직 카페를 둘러보았다. 알찬 문화탐방을 준비하고 진행하여 주신 관계자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무탈하게 탐방을 마칠 수 있었던 점에 감사드린다.

 

첫 번째 탐방지로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해안동로466번길 27(불은면 덕성리 27)에 있는 강화 광성보(廣城堡)에 다녀왔다. 광성보는 조선말 1871년(고종 8년)에 미국 해군과 격전을 벌였던 신미양요(辛未洋擾) 사적지이다. 그동안 와보고 싶었는데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이번에 한밭문화원에서 탐방지로 선정하여 둘러보게 되었다.

 

광성보는 강화 외성으로 강화 동남쪽 해안선이 손돌목 방향으로 돌출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광성보 경내에는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 등 3개의 돈대와 강화 외성 6개 문루 가운데 하나인 안해루(按海樓)가 위치한다. 안해루를 지나 염하(鹽河)라 불리는 강화해협을 구경하고, 안해루 우측 송림길을 따라 가면 신미양요 때 순절한 350여명의 군사를 추모하는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가 있고, 중군장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순 순절비와 광성파수순절비가 있는 쌍충비각을 만난다. 쌍충각 바로 아래 쪽에는 어재연과 어재순 외에 군졸 51인을 안장한 신미순의총이 있다.

 

조금 더 내려가면 강화해협의 손돌목을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손돌목 돈대가 있다. 이곳은 신미양요 때 백병전이 있었던 곳이다. 바로 아래에 있는 광성포대를 구경하고, 용의 머리처럼 해변으로 쭉 뻗어나 있는 곳에 설치된 용두돈대를 만난다. 다시 안해루를 돌아와 안해루 왼쪽에 있는 광성돈대를 둘러본다. 이곳에는 1977년에 복원 설치된 포좌 4개소와 대포, 소포, 불랑기 등 3문의 포가 전시되어 있다.

 

신미양요는 1871년(辛未年)에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 Incident)에 대한 항의와 조선의 강제 개항을 목적으로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으로 한국과 미국이 무력으로 충돌한 유일한 사건이다. 신미양요의 원인이 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1866년 7월 25일에 미국의 무장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부까지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9월 5일에 평안감사 박규수가 기름을 뿌린 짚을 가득 실은 목선들로 공격하여 배를 침몰시킨 사건이다.

 

1871년에 미국 극동함대는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후 해병 450명이 함포 지원사격을 받으며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끝까지 싸워 중군장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을 비롯한 59인의 장사 등 총 35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이때 파괴된 누각과 성곽 등은 1976년 복원되었다. 근대화에 뒤쳐졌던 조선 말에 무기체계가 열악한 상태에서 애국심만으로 미군들과 백병전을 치르며 전사한 어재연 등 장수들과 전사 후 신원 조차 파악이 안되어 무명용사로 묻힌 병사들의 무덤이 있다.

 

국가문화유산포탈에 소개된 안내문에 따르면,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다. 조선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이때 강화해협 주위에 설치한 12개의 진과 보 중의 하나로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년)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안해루(按海樓)라는 현판이 있는 성문을 설치하였다.

 

보(堡)는 일정한 규모를 가진 부대의 단위, 지휘소, 병사의 주둔지, 창고 등을 포함하며, 돈대(墩臺)는 경사면을 절토하거나 성토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으로 받친 방위시설을 말한다. 신미양요 때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고, 1976년에 새롭게 복원하였다.

 

▲ 광성보의 누각 안해루(按海樓) - 바다를 누르는 누각이라는 뜻의 안해루
▲ 안해루로 들어가면 만나는 강화해협 - 소금 강이라는 뜻의 염하(鹽河)로 불린다고 한다.
▲ 강화해협 쪽에서 바라본 안해루
▲ 안해루 우측 송림을 따라 걸으면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가 있다.
▲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쌍충비각
▲중군장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순 순절비
▲ 광성파수순절비
▲신미순의총 - 전사 후 신원 파악이 안된 51인의 묘 7기
▲손돌목 돈대 가는길
▲손돌목 돈대에서 바라본 손돌목
▲밑에서 바라본 순돌목 돈대
▲광성포대 자리
▲용두 돈대 가는 길
▲용두 돈대에 있는 강화유적지 정화기념비
▲용두 돈대에서 바라본 강화해협-염하
▲용두 돈대에서 뒤돌아본 해안가
▲안해루로 돌아와 왼쪽에 있는 광성 돈대로 향한다,
▲광성 돈대 입구
▲불랑기
▲2024년 4월부터는 유료 운영으로 전환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