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대전 한밭문화원에서 주관하는 2024년 3월 문화탐방에 참여하여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강화읍 관청리 743-1)에 있는 강화 고려궁지(高麗宮址)에 다녀왔다.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려 고종 19년)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시기인 강도(江都) 시기(1232년~1270년)에 사용하던 궁궐터이다.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1866년(丙寅年)에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를 일대를 칩입했던 병인양요 사건과 관련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궁지에 있던 건물을 불태우고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를 비롯한 340여권의 도서가 약탈되었다. 이곳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는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이라 귀중한 자료이다. 의궤는 2011년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아직도 실제 소유권은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국가문화유산포탈에 소개된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에는 정궁 이외에도 행궁(行宮), 이궁(離宮), 가궐(假闕)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38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고려 원종 11년)에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개경으로 옮기면서 몽골군의 요구로 모든 건물을 허물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 후 다시 강화유수부, 외규장각(外奎章閣), 장녕전(萬寧殿), 만녕전(萬寧殿) 등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졌다. 현재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 강화유수가 집무하던 동헌인 명위헌(明威軒)과 이방청(吏房廳)이 있고, 2003년에 복원된 외규장각이 남아 있다.(인용문헌: 국가문화유산포털 – 강화 고려궁지/일부 건물명과 한자어 등을 추가하였음).
이곳에서는 강화유수라는 특이한 관직명을 접하게 된다. 유수(留守)는 과거에 존재했던 관직명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당시의 도읍지나 이전 도읍지, 국왕의 행궁이 있던 곳에 유수부를 두었고 그곳을 관할하는 관직명이 유수이다. 조선 후기에는 수도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강화, 경기도 광주, 수원에도 유수부를 두었다.
고려 고종이 이곳 강화도로 피난을 오면서 일어났던 손돌목에 관한 일화가 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으로는 손돌목 이야기는 전설로서 고려 고종 때 이야기로 특정할 수가 없다고 하나, 손돌의 무덤이 손돌목 건너 김포군에 있는 점과 강화도로 피난 온 임금은 바로 고려 고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화 속의 임금은 고려 고종으로 단정해도 좋을 듯하다.
유경숙 소설가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yksook424)에 있는 손돌목에 관한 일화를 일부 옮기면 아래와 같다. 고려 고종은 몽골의 칩입에 항거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실행하고 사공 손돌이의 배를 타고 임진강과 한강 하류를 지나 강화도로 가고 있었다. 이곳 지형은 육지의 끝자락이 불룩 튀어나와 섬과 맞닿은 것처럼 보인다. 처음 오는 이는 영락없이 뱃길이 막힌 것으로 착각하기에 십상이다.
어둠을 틈타 천도하는 임금은 이런 지형을 보고 심기가 매우 불편해졌다. 뱃길도 없는 곳으로 손돌이는 노를 꾸역꾸역 저어 가고 있었다. 임금은 수차례 뱃길을 바로 잡도록 명하였지만 순박한 손돌이는 그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보기에는 막힌 듯 하오나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확 트일 테니 괘념치 마시옵소서.”라고 한 마디를 아뢰고는 묵묵히 노만 저어 갔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시간을 기다리기 위해 배를 멈추는 동안 마음이 극도로 초조해진 임금은 손돌이의 흉계로 의심을 하고 수행하는 신하에게 사공의 목을 치라고 명령한다. 죽음에 직면한 순간에도 임금의 안전항해를 바라는 손돌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그는 “바가지를 물에 띄워 그것을 따라가면 뱃길이 열릴 것입니다.”라고 아뢴 후 마침내 그 자리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이윽고 왕의 야행천도는 손돌이가 말한대로 바가지의 안내를 따라가 험한 협류를 빠져나와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임금은 한발 늦게야 자신의 성급했던 잘못을 뉘우치고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사공 손돌이의 장사를 후히 지내주고 사당도 세워 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도 이 뱃길은 손돌이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사공들에게 전해져 온다.(출처: 유경숙 소설가 블로그 – 손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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