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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기쁨/풍수학 공부

전북 순창군 인계면 광산김씨 김극뉴(金克忸) 묘

아진돌 2014. 4. 26. 16:05

  2014년 4월 20일 도반들과 함께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馬屹里) 용마산(龍馬山) 남쪽에 있는 광산김씨 김극뉴(金克忸, 1436〜1496) 선생의 묘소를 다녀왔다. 비문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광산김씨 김극뉴 선생의 묘소는 조선의 8대 명당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말의 콧구멍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잡은 말 명당이라고 한다. 조선 8대 명당으로 알려져 있어서 많은 풍수지리 서적들에서 언급되고 있다. 입수(入首)에서 보면 3기의 묘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입수 쪽에 있는 묘소는 김 공의 장인 묘이고 가운데 묘는 김 공보다 16년 일찍 돌아가신 김 공의 부인인 함양박씨 묘이며, 세 번째 묘가 김극뉴 선생의 묘소이다.

 

  입수(入首)는 해(亥) 입수이다. 나경을 놓아보면 해좌사향(亥坐巳向)처럼 볼 수도 있었으나, 건좌손향(乾坐巽向)이었다. 곤신(坤申) 득수에 우수좌류이고 을(乙) 파구였다. 88향법으로 보면 우수가 좌로 흘러 을진방(乙辰方) 수구이면 손사향(巽巳向)을 세우는 자생향(自生向)이다. 묘소에서는 현무 뒤의 산이 보이지 않으나 동네 입구에서 보면 바위산인 주산이 보인다. 주산은 용마산이라 하고 묘소 뒤의 우뚝 솟은 산은 말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형기론적 분석은 양봉환(2011)의 석사학위논문 『한국 8대 명당에 대한 풍수지리적 분석』을 참조하기 바란다. 마지막 사진으로 첨부한 등고선 지도도 양봉환의 논문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광산김씨 가문과 함께 김극뉴 공의 묘소를 소개한 최영주(1999: 299)의 『신 한국 풍수』도 참고할 수 있다. 묘소의 왼쪽으로 내려간 여기맥(말 고삐에 해당한다고 한다)에는 김극뉴 공의 후손들의 묘가 있다. 가장 아래 쪽에는 김극뉴의 사위이고 안산군수를 지낸 동래정씨(東萊鄭氏) 정광좌(鄭光佐)의 묘가 있고 그 위에 김 공의 손자이고 호조판서를 지낸 독송정(獨松亭) 김 개(金 鎧)의 묘가 있다. 그 뒤에는 김 공의 차남인 김소윤(金昭胤)의 묘가 있고 그 위에 김 개(金 鎧)의 손자인 김 희(金 僖)의 묘가 있다.

 

  김극뉴(金克忸)는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선생의 고조부이시며,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함양박씨(咸陽朴氏)의 사위이다. 사진을 통해 비문에 적힌 박 공의 함자를 읽을 수 없어 인터넷에 포스팅 된 이름을 검색하였으나 이름을 기술한 글이 없었다. 현장에서 확인을 했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모두가 직책을 사용하여 박 감찰이라고 기술하고 있었다. 이태호(1999:178)의 『새로 쓰는 풍수지리학-큰 명당은 착한 이의 것이다』는 함자를 득정으로 소개하고 있다. 박 감찰의 본관이 함안(咸安) 박씨로 오기되어 있으므로 착오 없기 바란다. 묘소에서 내려와 용마보건진료소 앞 주차장에서 만난 분(현재 재실에서 사시는 분)을 만났다. 주로 논산에 사는 광산 김씨들이 이곳에 와서 음력 10월 7일에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요사이는 노인들만 30여명이 오신다고 한다.

 

  이 묘소와 관련된 풍수설화는 두 설화가 회자되고 있다. 이태호(1999: 178)에서 소개하는 김극뉴 선생의 말 명당 설화는 다음과 같다. 전설에 의하면 함양박씨(咸陽朴氏) 득정은 딸과 사위 극뉴에게 “내가 죽거든 여기에 묻어다오”라고 당부하였다. 얼마후 득정이 별세한 후 딸은 출상하기 전날 밤 미리 파놓은 묘자리에 물을 가득 부어 질컥질컥하게 만들었다. 이튼 날 상주와 친지들이 시신을 운구하여 묘지에 도착하니 물이 차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랴부랴 그 윗자리를 파서 장사를 치렀다. 고인의 딸이자 극뉴의 부인인 함양박씨는 좋은 자리를 남편을 위해 남겨두고 싶어서 비상수단으로 친정아버지의 자리를 위로 밀쳐 올린 것이다. 극뉴는 몇 년 후 부인이 죽자 장인의 묘 바로 아래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16년후 자신은 장인과 부인의 무덤 아래에 비어 있던 대지(大地)로 들어간 것이다.

 

  이 설화는 인터넷에 게시되어 있는 다른 설화와 내용이 다르다. 아들이 없는 장인이 사위에게 명당을 양보했다는 설화이다. 김극뉴 선생의 장인인 박 감찰은 삼형제로 모두 풍수에 능통한 지사들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각자 자신들이 죽으면 묻힐 신후지지를 잡기로 하였다고 한다. 큰형인 박 감찰은 이곳의 말 명당을 찾았고, 둘째는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의 백운산 줄기에 있는 잉어명당을 찾았으며, 셋째는 임실군 가실마을 앞의 금계포란형을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김극뉴 공의 장인인 박 감찰은 외동딸만 있었고 아들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제사를 받들어줄 아들이 없으므로 사위가 좋은 자리에 들어가 외손이 번창하면 자신의 제사를 받들어 줄 것으로 생각하고 사위에게 자신의 신후지지를 양보하고 자신은 그 뒤의 입수도두 부분에 묻혔다고 한다.

 

  어느 설화가 맞는 것인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첫 번째 설화는 장장식(1992: 129)의 박사학위논문 『한국의 풍수설화 연구』에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한국구비문학대계 5-2』(전82권)를 근거로 소개한 “딸이 뺏은 명당” 설화와 맥을 같이 한다. 시집간 딸은 출가외인으로서 남이라는 가부장제적 관계에서 형성된 남성 선호 사상에서 구축된 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장장식(1992)이 한국구비문학대계에서 인용한 설화는 다음과 같다. 친정 아버지가 죽어 명당을 잡았는데, 시집간 딸이 밤에 몰래 물을 부어 흉당(凶堂)인것 처럼 꾸몄다. 친정에서 그 자리에 묘를 쓰려고 보니 물이 고여 있으므로 명당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곳에 묘를 썼다. 그러자 그 자리에 딸이 시아버지 묘를 쓰고 친정보다 부자로 살았다.

 

  장인이 사위에게 명당을 양보하였다는 설화는 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처럼 보이지만 김극뉴 선생의 장인을 장사 지낸 후 김극뉴 선생이 죽을 때까지 17년 이상이나 함양박씨 가문에서 명당 자리를 남겨 놓을 수 있었겠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핵가족 사회이고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의 우리 사회의 사고방식으로 의구심을 가져보는 허구일 수도 있다.

 

 

 

 

 

 

 

 

 

 

 

 

 

 

 

 

 

 

 

 

 

 

 

(아래 그림 출처 : 양봉환(2011). 석사학위논문, 『한국 8대 명당에 대한 풍수지리적 분석』)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