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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아산시 세심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0. 9. 12. 11:40

2020년 8월 29일에 대한불교 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여섯 번째 답사지로 제6교구 본사인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를 답사한 후 한우고기집들로 유명한 염치읍에서 점심을 먹고, 아산시에 있는 말사 중의 하나인 세심사에 다녀왔다. 세심사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산양길 180(산양리 220)에 위치하고 있다. 동네 소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면 만나게 되는 비구니 사찰로 마치 꼭꼭 숨겨놓은 절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곳 세심사 대웅전 앞에는 점판암청석으로 만들어진 구층석탑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보다는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기단부의 맨 위쪽 단이 마치 옥개석처럼 보여 10층 석탑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9층석탑이다. 자료에는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옥신(屋身) 등의 새로운 부재를 가미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볼 것은 아닌듯하다.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는 표현이 매우 부정적으로 느껴져 거북하지만, 화강암으로 기단부를 보충하여 탑이 안정되게 보존되는 것 같은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다만 입구의 누각 밑을 지나면서 탑을 바라보면 화강암으로 높인 만큼 상층부가 안보이는 것이 아쉽다. 문화재는 함부로 손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마곡사 홈페이지(http://www.magoksa.or.kr)의 말사 소개자료에 따르면, 백제 때 창건하였으며 654년(신라 선덕여왕 14)에 자장(慈藏)이 중창하였다고 전하나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은 없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 《범우고》 등에 '신심사(神心寺)'라는 이름으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까지 꾸준히 명맥을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1968년 일타(日陀)와 도견(道堅)이 절 입구에 있는 '세심당(洗心堂)'이라는 부도에서 이름을 따와 세심사로 고쳤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산신각·범종각·요사채가 있다. 대웅전 안에는 소조(塑造) 아미타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회상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신중탱화는 1794년(정조 18)에 조성한 것으로 승초(勝初)·원정(元正)·보심(普心)·품관(品寬)·대운(大云) 등이 그렸다. 영산전에는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 및 판관상 1위가 봉안되어 있다. 불화로는 영산회상도와 나한도 2점, 독성도 2점 등이 있다. 산신각에는 1935년에 조성한 칠성탱화와 1937년에 조성한 산신탱화가 있다.

   

절의 중심부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청석(靑石)으로 만든 구층석탑(충남문화재자료 231)이 있는데, 상륜부(相輪部)가 없으며 1968년 일타와 도견이 옥신(屋身) 등의 새로운 부재를 가미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부도는 본래 절 입구에 3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대웅전에서 영산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송매당(松梅堂)' 부도 2기만 있다. 이밖에 1563년(명종 18)에 판각된 부모은중경판과 불교 의식집인 청문판(請文板) 4매가 남아 있다. 이 밖에 1563년(명종18년)에 판각된 부모은중경판과 불교 의식집인 청문판 4매가 남아 있다. 세심사가 위치한 영인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주변에는 많은 유적이 있으며, 산의 정상부에는 고대의 산성이 있어서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절 입구에서 누각 아래로 고개를 숙여 계단을 오르면 계단 위로 탑과 대웅전이 보이는 가람 배치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이런 가람 배치를 이곳 세심사에서 다시 만났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넓은 큰 절에서의 구조와 달리 이곳 누각 밑의 계단은 무척 좁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위 층의 누각은 네 칸짜리 누각으로 입구를 일부러 작게 만든 것 같다. 입구에 쌓아 있는 축대가 약간은 위협적이지만 사천왕에 비하면 무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