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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행 /조계종 교구본사 순례

예산군 수덕사에 다녀오다

아진돌 2020. 9. 24. 08:05

2020년 9월 13일에 대한불교 조계종 25개 교구 본사 답사계획에 따라 일곱 번째 답사지로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에 다녀왔다. 마침 10시에 시작하는 사시(巳時) 예불이 있어서,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오랜만에 대웅전에서 사시 예불에 참가할 수 있었다. 예불을 마친 후 빵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덕숭산 정상에 올랐다. 올라가는 길에 정혜사의 관음전을 참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수덕사로 돌아와서는 견성암의 법당과 관음전을 참배할 수 있었다. 해미읍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만공스님께서 경허스님의 인도로 태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던 천장사로 출발하였으나, 진입로가 공사 중이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돌아와야 했다. 대전으로 오는 길에 추사 고택을 둘러보았다.

 

수덕사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 79(덕산면 사천리 19번지)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다. 1960년대 중반에 송춘희 씨가 불러 인기를 끌었던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의 영향으로 나이들은 분들은 수덕사를 여승들의 사찰로 오해하고 있기도 하다. 수덕사는 우리나라 4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며, 송원 설정(雪靖) 스님이 방장(方丈)으로 계신다. 총림이란 선원(禪院). 강원(講院, 승가대학 또는 승가대학원), 율원(율학승가대학원) 및 염불원을 갖추고, 본분종사인 방장의 지도하에 대중이 여법하게 정진하는 종합수행도량을 말한다. 현재 조계종 총림은 조계총림 송광사, 영축총림 통도사, 가야총림 해인사, 고불총림 백양사, 금정총림 범어사, 팔공총림 동화사, 쌍계총림 쌍계사와 덕숭총림 수덕사가 있다.

    

수덕사 홈페이지(www.sudeoksa,com)에 따르면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설화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덕산 향토지에 실려 있는 수덕 도령과 덕숭 낭자의 설화이고, 두 번째 설화는 대웅전 서쪽 백련당 뒤쪽의 관음바위와 관련한 관세음보살 설화이다. 홍무 마을에 사는 수덕 도령이 사냥을 나갔다가 덕숭 낭자를 만나 청혼하였으나 여러번 거절을 당했다. 덕숭 낭자가 자기 집 근처에 절을 지어 주면 결혼하겠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였고,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절을 지었으나 두 번씩이나 불이 나서 사라진 후에 세 번째에 절을 완성하였다. 절을 완성한 후 덕숭 낭자는 사라진다는 설화이다. 두 번째 설화 역시 관세음보살이 묘령의 여인으로 현신하셔서 불사를 돕는 설화이다. 묘령의 여인에 반한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하게 되었다. 많은 시주를 하여 절이 완성되어 낙성식이 있던 날 묘령의 여인은 바위 속으로 사라진다. 수덕사 대웅전 서쪽 백련당 뒤쪽에 있는 바위의 가라진 틈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도 이 바위를 관음바위라 부르고 있고, 관세음보살이 현신하는 성역이며, 바위가 갈라진 틈으로 봄이면 버선 모양의 버선꽃이 피고 있다고 한다. 바위 바로 밑에는 관세음보살입상이 있고, 위쪽의 관음전 앞마당에는 최근에 커다란 관세음보살입상이 세워졌다.

   

수덕사 홈페이지에 따르면 서기 384년 백제 침류왕(枕流王) 원년에 동진(東晉)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 땅에 불교를 전한 후 수덕사를 언급한 중국의 사서(史書)들의 기록을 전하고 있다. 수덕사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 시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위덕왕 때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수도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하였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 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였고(수덕사 홈페이지에서는 위덕왕 때로 기록되어 있다-글쓴이 추가)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국보 제49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한 백련당(白蓮堂)‧청련당(靑蓮堂)‧염화실(拈花室)‧조인정사(祖印精舍)‧무이당(無二堂)‧심우당(尋牛堂)‧황하정루(黃河精樓)‧천왕문‧금강문‧일주문(一柱門)‧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수덕사 주차장에서 상가 지역을 지나면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라는 한글 편액이 걸려 있는 일주삼간문(一柱三間門, 전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네 개의 가둥이 나란히 서 있다)을 지나게 된다. 호젓한 산길을 오르면 일주문을 만난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에 이르는 길은 산림가람의 전형적인 가람 배치에 따라 계단을 통해 9개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역사 두 분이 지키고 있는 금강문을 지나며, 이를 지나면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난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왼쪽에 7층석탑이 있고, 바로 앞에는 2층 누각인 황하정루(黃河精樓)가 있다. 황하정루를 지나 옆으로 비켜 계단을 오르면 중앙에 3층석탑, 좌측에는 범종각, 우측에는 법보각이 있다. 다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앞마당이다.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여래탑이라고도 불리는 삼층석탑이 중앙에 있고, 좌측 즉, 서쪽에는 백련당, 동쪽에는 청련당이 있으며 대웅전을 마주하게 된다.

   

대웅전은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건립된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에 주심포 건물이다. 맞배지붕의 멋진 지붕과 배흘림기둥 및 측면의 기하학적 구조를 바라보면 저절로 반하게 된다. 영주 부석사 극락전과 함께 건축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건물이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삼존불은 보물 제1381호로 목조삼세불좌상이라고 칭해지며, 만공 스님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에 따르면, 이 절의 산내암자로는 정혜사(定慧寺)를 비롯하여 견성암(見性庵)‧금선대(金仙臺)‧환희대(歡喜臺)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의 말사는 66개이다. 이 가운데 정혜사에는 비구 선원인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있으며, 견성암에는 비구니 선원인 제일선원(第一禪院)이 있다. 또 금선대에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으며, 진영각 안에는 만공의 영정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환희대는 『청춘을 불사르고』를 지은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가 죽은 곳이며, 견성암 또한 김일엽이 기거하던 곳이다.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되어 있는 거문고는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으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이 거문고에는 이조묵(李祖默)이 새긴 공민왕금(恭愍王琴) 이라는 글씨와 함께 만공의 시가 새겨져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수덕사 하면 만공스님이 떠오른다. 만공스님은 1871년(고종 8년) 전라도 태인군 군내면 상일리(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송신통(宋神通)이며 어머니는 김씨였다. 본관은 여산으로 본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법명은 월면(月面)이고 만공은 법호이다. 따라서 월면 스님으로도 불렀다. 1883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 올랐다가 어느 날 불상을 보고 감동하여 출가를 결심, 그길로 내려와 공주군 동학사에 입산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다. 1884년(고종 20년) 경허(鏡虛, 성우 1849~1912)의 인도로 서산군(현재 서산시) 천장사(天藏寺)에서 태허(泰虛)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경허(鏡虛)를 계사하여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득도하였다. 그는 이후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홀로 참선에 열중하다가 1895년 아산군(현재 아산시) 봉곡사(鳳谷寺)에서 새벽 범종을 치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던 중 1904년(광무 7년) 스승 경허로부터 전법계를 이어받았다. 이후 예산군 덕숭산(德崇山)에 머무르며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후학을 지도하여 한국 선불교 중흥에 기여했다.

   

그가 고명하다는 말을 듣고 궁궐에서 상궁과 나인들이 그의 법문을 들으러 찾아오기도 했다. 하루는 만공이 그들에게 노래 하나를 불러주었다. '앞산에 딱따구린 없는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 그 양반은 있는 구멍도 못 찾네.'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궁인들이 돌아가고 나자 상좌들은 그 뜻을 물으니 내가 부른 그 노래가 바로 법문이라 답하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상좌들은 나중에 은유적으로 풍자한 그 뜻을 이해하였다. 만공이 들려준 노래를 우리말로 번역해 놓으니 누구나 이해할 수 있지만, 상좌들이 그 뜻을 물었다는 말을 읽으면, 아마 이 법문은 한시 형태로 읊으신 노래일 것이다. 도반에게 한시 원문을 찾아보겠다고 했는데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